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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74 불교(개원석교록 7권 16편 / 開元釋敎錄)

by Kay/케이 2021.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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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 716

 

지승 지음

 

그리하여 마침내 거기서 10여 년 동안을 함께 머물렀다. 아사리(阿闍梨) 지현(智賢)은 서역으로 돌아가서 멸도(滅度)하였고, 오래지 않아서 화상(和上)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사나굴다는 홀로 되어 편안히 몸을 의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북적(北狄)의 임금과 백성들이 자못 복과 이익[福利]을 넓히는 데에 힘입어 이로 인하여 표연히 머무는 곳마다 중생들을 이롭게 하였다.

그 후 제()나라 승려 보섬(寶暹)ㆍ도수(道邃)ㆍ지주(智周)ㆍ승위(僧威)ㆍ법보(法寶)ㆍ승담(僧曇)ㆍ지조(智照)ㆍ승률(僧律) 10인이 무평(武平) 6(575)에 서로 약속하여 서역에 가서 경을 구해 오기로 하고 동행하였다. 가고 오는 데 7년이 걸려서야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얻어 온 범본(梵本)은 무릇 260부에 달하였다. 그들이 돌궐국에 이르렀을 때에 주()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켰고 불법도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물러나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면서 그 지방에서 머물렀다. 마침내 지덕(至德)을 만나게 되니, 마치 목마를 때 물을 만난 것 같고 어두운 데서 광명을 만난 것 같았다. 그리하여 함께 거처하면서 도를 강론하며 서로 즐기게 되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새로운 경을 함께 열람하면서 이름과 제목을 붙이고 번역을 청하였으므로 예전의 목록을 살펴보았더니 교묘하게도 예전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계율 등은 내용이 성실하였으므로 저마다 사사로이 다행하게 여겼다. 보배를 얻고 장인(匠人)들을 얻은지라 헛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함께 향을 사르고 서약하며 이를 널리 유포시키기로 약속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이어받게 되자, 곧 불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보섬 등은 경을 먼저 가지고 와서 시운에 부응하게 하였다. 보섬 등은 개황(開皇) 원년(581) 12[季冬]에 경읍(京邑)에 이르러 그 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칙명으로 부촉해서 사람들이 찾아와 경을 번역하게 하였다.

개황 2(582) 2[仲春]에 곧 전술(傳述)에 착수하였는데, 늦여름[季夏]에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도읍을 다섯 번 옮긴 것은 아마도 백성들이 모두 죽을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이는 곧 길하거나 흉한 땅에 사는 것에 따라 수명이 짧아지거나 길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꾀하여 옛 것을 버린 것이니, 비유하면 농가에서 가을의 수확을 바라는 일과 같은 것이다.

용수(龍首)의 산천과 평원은 수려하고 수목이 잘 자라는 곳이다. 마땅히 정정(定鼎)의 터로 도읍을 세워서 길이 유업을 굳힐 만한 곳이다. 여기에 성을 쌓고 그 성을 대흥성(大興城)이라 하고 궁전을 대흥전(大興殿)이라 하며, 문은 대흥문(大興門)이라 하고, 현을 설치하여 대흥현(大興縣)이라 하라. 정원과 연못은 이름을 모두 대흥이라 하며, 절은 대흥선사(大興善寺)라 하라. 그리고 이 절 안에서 불법의 근본을 전수하게 하라.”

그때 사나굴다는 그대로 계속 북적(北狄)에 머물렀다. 개황 4(584)에 이르러 대흥선사 사문 담연(曇延) 30여 인이 몸소 번역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나 그 음과 뜻이 어긋나게 되었다. 그러자 북쪽 땅에 사나굴다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그를 초청하여 경성(京城)에 돌아오게 하려고 상주(上奏)하였다. 황제는 곧 특별히 명령을 내려 그를 초빙하게 하였다. 사나굴다는 이미 서역으로 돌아갈 길이 끊어져 체류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밝은 세상에서 다시 삼보(三寶) 만나기를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먼 곳에서의 방문을 받게 되자 기꺼이 사신과 함께 길을 떠나 수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 문제(文帝)는 낙양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사나굴다는 천자를 알현하게 되었다. 천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문안하는 말을 계속하였고 서울의 궁궐로 돌아가기 전에 곧 불경을 번역하여 널리 유포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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