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052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14권

by Kay/케이 2024. 11. 2.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불설대승보살장정법경(佛說大乘菩薩藏正法經) 14

 

대승보살장정법경 제14권


서천 역경삼장 조산대부 시광록경 전범대사 사자사문 신 법호 등 한역
변각성 번역


4. 여래부사의품 ⑧

“또 사리자여, 어떤 것을 여래 대비심(大悲心)의 불가사의라 하느냐? 믿음에 머무는 보살은 이 말을 듣고는 마땅히 깨끗한 믿음을 내어 분별을 초월하고 온갖 의혹을 떠나야 하며, 나아가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사리자여, 여래의 대비심이란 이른바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들을 항상 가엾이 여겨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비심(悲心)은 그 작용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작용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나니, 여래의 대비심은 한량이 없이 불가사의하고 견줄 데가 없으며,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말할 수 없이 가장 깊은 것이다. 그 어업(語業)은 다 말할 수 없나니, 왜냐하면 부처님 여래의 증득함을 따라 보리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을 위해 대비심을 일으키는데, 이와 같은 보리를 따르는 것이 곧 이와 같은 대비이니라.
사리자여, 어떤 것을 여래께서 증득한 보리라 하느냐? 여래께서는 근본이 없고,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에 보리를 증득하셨느니라. 어떤 것을 근본이라 하고, 또 머무름이라 하느냐? 이른바 신견(身見)이 있음을 근본이라 하고, 허망한 분별을 의지하는 것을 머무름이라 한다. 여래께서는 보리가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하게 아시나니, 두 가지 법이 다 평등하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고, 근본이 없다는 것이니라.
여래께서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정등보리(正等菩提)를 이루셨는데, 중생들은 머무름도 없고 근본도 없다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에 대해서 대
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적정(寂靜)이요 근적(近寂)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래께서는 정각을 이루셨다. 어떤 것이 적정이며, 어떤 것이 근적인가? 안을 적정이라 하고, 밖을 근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눈이 공(空)이기 때문에 나[我]와 내 것[我所]이 자성(自性)이 없으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며, 이와 같이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이 공이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이 자성이 없으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눈이 공임을 알고는 빛깔에 취함이 없으니 이것을 적정이라 하고, 나아가 뜻이 공임을 알고는 법에 취함이 없으니 이것을 근적이라 한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 보리의 적정 등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해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자성이 밝은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정각을 이루었다. 어떤 것을 자성의 밝음이라 하느냐? 이른바 자성이 물듦이 없기 때문에 허공과 같은 것이니, 허공의 자성은 일체에 두루하였다. 허공이 평등하기 때문에 일체 법이 평등하다. 필경에 자성이 이렇게 밝으니, 이 밝은 성품은 그 때를 따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우치한 사람과 범부들은 객진(客塵) 번뇌에 물들었기 때문에 이 자성의 밝은 법 가운데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해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들어옴도 없고 나감도 없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정각을 이루었다. 어떤 것을 남이 없음이라 하느냐? 상(相)이 없기 때문에 남이 없으며, 또 남이 없음이란 일체 법을 버림이 없는 것이다. 들어옴이 없음이란
일체 법에 취함이 없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나가고 들어옴이 없는 법을 평등하게 관조(觀照)하신다. 여래께서는 피차(彼此)가 없으니, 일체 법에서 피차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현재에 정각을 이루셨느니라. 이와 같은 나가고 들어옴이 없는 법을 중생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모양도 없고 반연도 없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정각을 이루었다. 어떤 것을 모양이 없고, 어떤 것을 반연이 없다 하느냐? 이른바 안식(眼識)이 얻는 바 없음을 모양이 없음이라 하고, 빛깔에 보는 바 없음을 반연이 없음이라 한다. 나아가 의식이 얻는 바 없음을 모양이 없음이라 하며, 법에 보는 바 없음을 반연이 없음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여, 이 모양 없고 반연 없는 법은 모든 성인의 경계이다. 어떤 것을 성인의 경계라 하느냐? 이른바 삼계가 곧 성인의 경계이다. 저 성인의 경계는 곧 경계가 없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과 이생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어서 3세(世)가 평등하고 3륜(輪)이 청정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정각을 이루었다. 어떤 것을 3륜이 청정하다 하느냐? 이른바 과거의 마음이 옮겨가지 않고, 미래의 식(識)이 깨달음이 없으며, 현재의 뜻이 움직임이 없어서 마음과 뜻과 식이 전혀 머무름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분별이 없고 미래에 받아들임이 없으며 현재에 희론(戱論)이 없다. 이 세 가지 평등이 3륜의 청정한 법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해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곧 무위(無爲)이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정각을 이루었다. 이른바 안식(眼識)이 아는 바 아니요, 나아가 의식의 아는 바 아니니, 이것을 무위라 한다. 무위는 곧 생멸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3륜의 청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이 곧 무위이다. 그러나 유위(有爲)의 법도 다 안다. 왜냐하면 일체 법의 자성(自性) 그것은 곧 없는 성품이며, 성품이 없는 것은 곧 둘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위의 법은 또한 신증(身證)이 아닌데,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차별이 없는 글귀이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정각을 이루었다. 어떤 것을 차별이 없다 하며, 어떤 것을 글귀라 하느냐? 이른바 말한 바와 같음을 글귀라 하고, 머무름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법계를 글귀라 하고, 갖가지 성품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한다. 실제를 글귀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성품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공(空)을 글귀라 하고, 소득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한다.
모양이 없음을 글귀라 하고, 살핌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소원이 없음을 글귀라 하고, 분위(分位)가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중생이 없음을 글귀라 하고, 중생의 자성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허공을 글귀라 하고, 소득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남[生]이 없음을 글귀라 하고, 멸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무위(無爲)를 글귀라 하고, 행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보리를 글귀라 하고, 근적(近寂)을 차별 없음이라 하며, 열반을 글귀라 하고, 변함이 없음을 차별 없음이라 한다.
사리자여, 이것은 이와 같은데,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몸이나 마음으로 증득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몸은 지각이 없고 지음이 없고 움직임이 없어서 마치 초목이나 기와 조각과 같으며, 마음은 허깨비와 같고 물속의 달과 아지랑이와 같기 때문이다. 몸이나 마음은 이런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그것이 곧 보리로서 이것은 세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또한 보리는 말할 수 있는 조그만 법도 아니니, 몸이거나 마음, 법이거나 법 아닌 것, 진실이거나 진실이 아닌 것, 참이거나 허망한 것, 이것들은 다 말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리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저 일체 법은 말로 용납할 수 있는 분위(分位)가 없는 것이니, 마치 저 허공이 조금도 분위가 없는 것과 같으며, 말이 없기 때문에 보리도 그와 같아서 분위도 없고 말도 없는 것이다.
사리자여, 만일 그것을 여실히 살펴보면 저 일체 법은 본래 말이 없는 것이다. 법은 말이 없으면서 또한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법의 이치를 중생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그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는 취하는 것도 없고 또 감추는 것도 없다. 어떤 것을 취함이 없다 하며, 어떤 것을 감춤이 없다 하느냐? 이른바 눈을 알기 때문에 취하는 것이 없다 하며, 빛깔을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감춤이 없다고 한다. 나아가 뜻을 알기 때문에 취함이 없다 하고, 법을 얻음이 없기 때문에 감춤이 없다는 것이니라.
사리자여, 여래께서는 취함이 없고 감춤이 없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었다. 또 눈에 취함이 없고, 빛깔에 감춤이 없으며, 식(識)에 머무름이 없고, 나아가 뜻에 취함이 없고, 법은 감춤이 없으며, 식에 머무름이 없다.
그는 식에 머무름이 없으나 저 일체 중생의 마음에 머무른다. 어떻게 이것을 아시느냐? 이른바 네 종류의 법이 있어서 일체 중생의 마음에 머무른다.
네 종류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색(色) 가운데 머무르고, 수(受)ㆍ상(想)ㆍ행(行) 가운데서 일체 중생의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4법으로 중생의 마음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 머무름도 또한 머무름이 없는 것이니, 여래께서는 이런 머무름이 없는 법의 진실한 범위를 아시지만 중생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곧 공(空)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공이기 때문에 보리도 공이며, 모든 법도 공이다. 여래께서는 모든 법이 공이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었으나 또한 공이 아니기 때문에 증득한 바가 있다. 공이나 보리나 다 동일한 이지(理智)이므로 둘이 아니다. 공과 보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종류의 법이 없으며, 모든 법이 둘이 아니요 종류가 없기 때문에 곧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으며 행이 없나니, 필경에 행이 없고 모음이 없는 법을 공이라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고집하는 견해와 집착을 다 떠났다. 그리고 승의제(勝義諦) 가운데에는 조그만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그렇기 때문에 공이라 한다. 여기에서 공이라고 한 것은 허공과 같은 것이다. 곧 이 허공을 공이라고 말하고자 해도 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며, 또한 공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공에 대해 이해한다면 곧 모든 법이 임시로 이름을 붙인 것임을 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방위에도 있지 않고, 또한 방위를 떠난 것도 아니다. 그 임시로 붙인 이름이 방위에도 있지 않고 방위를 떠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법은 일시로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이, 일체의 법도 그와 같아서
방위에 있지 않고 방위를 떠난 것도 아니다. 여래께서는 본래 이와 같이 나거나 일어남이 없음을 여실히 아시며, 자성이 해탈되어 있어서 묶을 것도 없고 풀 것도 없음을 여실히 아신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과 이생들은 이런 법을 알지 못하므로,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해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가 허공과 같기 때문에 다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는 것처럼, 보리도 또한 그와 같아서 높고 낮음이 없다. 만일 모든 법이 필경에 전혀 없는 것을 알면 다시 높고 낮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리자여, 여래께서는 일체 법이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었다. 비록 이룸이 있다 하더라도 티끌만한 법도 없는 것이며, 높거나 낮거나 시설할 수 있는 것이다. 여실한 지혜는 피차가 없음을 안다.
어떤 것을 여실한 지혜라 하느냐? 이른바 근본이 없는 법이니, 비록 나는 바가 있다 하더라도 포섭함이 없고,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주재함이 없고 포섭함이 없기 때문에 나거나 나지 않거나 인연을 따라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변하는 법도 없고 변하지 않는 법도 없는 것이니라. 여래께서는 법에 있어서 단멸(斷滅)의 모양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와 같이 단멸이 없는 법을 중생들은 모르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는 여소설구(如所說句)이다. 어떤 것을 여소설구라 하느냐? 그 보리와 같이 색법(色法)도 그러하여 진여(眞如)를 떠나지 않으며, 그 보리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도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 보리와 같이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ㆍ공계도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고, 그 보리와 같이
안계ㆍ색계ㆍ안식계 내지 의계ㆍ법계ㆍ의식계도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 이를 말미암아 이와 같은 여러 성인의 법문을 시설하는 것이니, 이른바 온(蘊)ㆍ처(處)ㆍ계(界) 등이니라.
여래께서는 여실한 법으로 현재에 보리를 증득했고, 뒤바뀜이 없는 법으로 현재에 보리를 증득했다. 먼저 말한 것과 같이 중간과 나중에 한 말도 또한 그러하다. 과거에도 남이 없고, 미래에도 남이 없으며, 현재의 성품도 떠난 것이다.
이와 같은 여소설구 가운데에서 한 가지 법을 설한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많은 법을 말한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또 많은 법을 설한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한 가지 법을 설한 것도 그와 같다. 여기에서 설한 것처럼 하나이거나 많은 것이거나 조금도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소설구를 중생들은 모르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는 상(相)에도 들어가고, 무상(無相)에도 들어간다. 어떤 것을 상이라 하고, 어떤 것을 무상이라 하느냐? 여기에서 상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일어나는 일체의 선법이며, 무상이라고 말한 것은 일체 법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상이란 마음이 머무는 분위(分位)이며, 무상이란 곧 상이 없는 삼마지법이다. 또 상이란 곧 생각ㆍ헤아림ㆍ셈ㆍ살핌이며, 무상이란 곧 헤아림을 뛰어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헤아림을 뛰어넘는가? 식업(識業)이 없기 때문이다. 또 상이란 유위(有爲)로 살피는 것[伺察]이며, 무상이란 무위(無爲)로 작증(作證)하는 것이다.
이 상과 무상의 법을 우부(愚夫)와 이생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란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을 번뇌가 없다 하고,
어떤 것을 취함이 없다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번뇌가 없다 함은 이른바 네 종류의 번뇌의 법을 떠나는 것이니, 첫째 욕심의 번뇌를 떠나는 것이요, 둘째 유(有)의 번뇌를 떠나는 것이며, 셋째 무명의 번뇌를 떠나는 것이요, 넷째 견해의 번뇌를 떠나는 것이다.
취함이 없다 함은 이른바 네 종류의 취함을 떠나는 것이니, 첫째 욕심의 취함을 떠나는 것이요, 둘째 아어취(我語取:내가 있다고 하는 주장과 그에 대한 집착)를 떠나는 것이며, 셋째 견해의 취함을 떠나는 것이요, 넷째 계금(戒禁)의 취함을 떠나는 것이다. 이런 4취(取)는 다 무명에 덮이고 애수(愛水)에 빠져서 아견(我見)으로 온(蘊)ㆍ처(處)ㆍ계(界)의 법에 집착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저 아어취(我語取)가 근본이 되는 줄을 아시기 때문에 나의 청정함을 얻고는 일체 중생도 다 청정하게 하시는 것이다. 만일 청정해지면 조그만 법도 분별함이 없어지고, 만일 분별함이 없으면 깊고 굳게 마음을 먹게 되며, 만일 깊고 굳은 마음먹음과 상응하면 무명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니, 무명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12인연[有支]도 일어나지 않아서 그것은 곧 나지 않고, 그것은 결정적이니라.
만일 그것이 결정적이면 그것은 조복(調伏)의 뜻이요, 그것은 승의제(勝義諦)이다. 승의제 가운데에는 보특가라의 뜻이 없고, 보특가라의 뜻이 없으면 곧 말할 수 없다는 뜻이며, 말할 수 없다는 뜻은 곧 반연으로 생긴다는 뜻이다. 반연으로 생긴다는 뜻은 곧 바른 법이라는 뜻이요, 바른 법이라는 뜻은 곧 여래라는 뜻이다. 이와 같기 때문에 모든 법은 다 반연으로 생긴다고 보아야 한다.
만일 법을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요, 그 본 대로 여실히 관찰하면 조그만 법도 볼 것이 없을 것이며, 만일 볼 법이 없으면 곧 상이 없고 반연할 바 없음을 볼 것이니, 만일 이렇게 보면 그것은 곧 진실을 보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 법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정각을 이루었으니,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다. 이와 같은 번뇌가 없고 취함이 없는 법을 우부와 이생들이 모르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다 깨닫게 하기 위하여
중생들에 대해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또 사리자여, 보리는 청정이요 무구(無垢)요 무착(無著)이다. 어떤 것을 청정이라 하고, 어떤 것을 무구라 하며, 어떤 것을 무착이라 하느냐? 이른바 공(空)이 청정이요, 모양 없음이 무구며, 소원 없음이 무착이다. 생(生)이 없음이 청정이요, 지음 없음이 무구이며, 일어남 없음이 무착이다. 자성(自性)이 청정이요, 원만히 깨끗함이 무구이며, 밝음이 무착이다. 희론(戱論) 없음이 청정이요, 희론 떠남이 무구이며, 희론의 근적(近寂)이 무착이다.
진여가 청정이요, 법계가 무구이며, 실제(實際)가 무착이다. 허공이 청정이요, 텅 빈 것이 무구이며, 광대함이 무착이다. 안을 앎이 청정이요, 밖으로 행함 없음이 무구이며, 안팎에 얻을 바 없음이 무착이다. 온(蘊)을 앎이 청정이요, 계(界)의 자성이 무구이며, 처(處)를 떠난 모든 업이 무착이다. 과거를 다한 지혜가 청정이요, 미래에 남이 없는 지혜가 무구이며, 현재의 법계에 편안하게 머무름이 무착이니라.
사리자여, 이 청정과 무구와 무착을 한 법으로 다 포섭할 수 있으니, 이른바 적정(寂靜)이라는 글귀이다. 만일 적정이 변적(徧寂)이요 변적이 근적(近寂)이며 근적이 곧 무적(無寂)이면, 이것은 모니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니라.
또 사리자여, 허공과 같기 때문에 보리도 그러하고, 보리와 같기 때문에 모든 법도 그러하며, 모든 법과 같기 때문에 중생도 그러하고, 찰토(刹土)도 그러하며, 열반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것을 열반의 평등이라 한다. 이것은 일체 법이 끝까지 청정한 바른 인(因)으로 대치(對治)할 만한 것이 없어 대치의 인을 떠난 것이니, 본래 청정하고, 본래 무구이며,
본래 무착이다. 여래께서는 저 모든 법으로써 색(色)이거나 색이 없거나 본래 그런 것임을 아시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셨다. 저 중생계가 청정하고 무구하고 무착임을 보시기 때문에, 곧 유희 신통을 일으켜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일으키시느니라.
사리자여, 알아야 한다. 여래의 대비심은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고 집착이 없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항상 운행한다. 그러나 깨침이 없고, 일어남이 없으며, 관찰함이 없으면서 시방의 일체 세계에 두루하여 걸림이 없이 펼쳐지느니라.
사리자여, 여래의 대비심은 가없고 끝없어 허공과 같다. 만일 허공의 한계를 알고자 한다면 곧 여래 대비의 한계를 알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머무르는 보살은 여래의 불가사의한 대비심에 대한 말을 듣고는 마땅히 깨끗한 믿음을 내어 분별을 초월하고 온갖 의혹을 떠나야 하며, 나아가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이 이치를 거듭 밝혀 게송을 설하셨다.

근본도 없고 머무르는 법도 없기 때문에
현재에 보리를 증득했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깨달은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하신다.

안의 안근(眼根)을 공(空)이라 함을 알고
밖의 색법(色法)을 공이라 함을 아는 것도 또한 그러하여
적정(寂靜)과 근적(近寂)의 미묘한 법문으로
부처님께서는 보리를 증득했다고 말씀하신다.

저 모든 중생들은 알지 못하나니
비발사나(毘鉢舍那)와 또 사마타(奢摩他)에서
그 글귀의 뜻을 깨닫고 중생들을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의 방편을 굴리신다.

모든 법의 자성은 본래 밝고 진실하며
보리는 청정하여 허공과 같다.
저 중생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대비심으로 방편을 굴리신다.

일체의 중생들은 집착이 많아
이치 그대로 상응하지 못하므로
들어감도 없고 나옴도 없는 미묘한 법문으로
부처님께서는 보리를 증득했다고 말씀하신다.


깨닫지 못하는 저 중생들을 위하시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대비의 마음을 일으키셨네.
모든 법은 모양도 없고 반연함도 없으니
이것이 모든 성인들의 경계이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의 경계가 아니므로
부처님께서는 보리를 증득하고 나서 방편을 설하셨네.
그런데 이생들은 그것 알지 못하기에
그들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래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시기 때문에
그 성품을 따라 대비의 마음을 일으키시나니
무위의 자성의 묘한 법문은
본래에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알아야 한다. 저 법은 머무는 곳이 없어
언제나 세 가지 모양과 서로 걸맞는 것을.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모든 법은 유위의 자성임을 알지 못하네.

그 근기 따라 일으키는 대비의 마음은
이와 같은 이치의 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보리는 몸으로 깨달아지는 것 아니거니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아님도 또 그렇다.

몸은 본래 자성이 지각하여 앎이 없나니
마음이 꼭두각시 법 같음도 또한 그렇다.
그런데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것이 몸과 마음의 자성임을 알지 못하네.

그 근기를 따라 일으키는 대비의 마음은
이 이치의 법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훌륭한 보리를 증득하셨나니
자연의 지혜로 거룩한 이 도량에 앉으셨다.

앉아서 중생 세계를 두루 관찰하실 때
중생들은 갖가지 나쁜 세계 속을 돌아다녔다.
부처님께서는 그것 보시고 못내 가엾이 여겨
생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대비를 굴리신다.

교만 따위의 법에 미혹하여 집착하고
견해의 그물에 덮여 고(苦)를 낙(樂)이라 하며
덧없음과 더러움과 나[我] 및 중생
이러한 것 등을 뒤바뀌게 헤아려 집착한다.

부처님께서는 그것 보고 못내 가엾이 여겨
모든 집착 가운데서 대비의 마음 굴리시는데
어리석음의 덮개가 3유를 두루 덮을 때
어두움 속에 어떤 광명도 전혀 비추지 않네.

마치 저 해의 광명이 구름에 덮이는 것처럼
더러움 없는 지혜의 광명은 모두 다 덮이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 보시고 못내 가엾이 여겨
생사의 바퀴 속에서 대비를 굴리신다.

탐애(貪愛) 때문에 모든 나쁜 세계가 생겨
바른 도를 다 파괴하되 끝까지 파괴하나니

지옥이나 방생이나 아귀들 속으로
중생들은 업 때문에 다 떨어진다.

과거의 부처님께서 바른 도를 말씀하신 것처럼
중생들 위해 열어 밝히고 나타내 보이시나니
부처님께서는 중생들 보고 못내 가엾이 여겨
생사의 바퀴 속에서 대비를 굴리신다.

모든 법의 여실한 성품을 다 아시나니
그것은 탁 트이고 밝게 비추어 허공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 세간 사람들
최상의 밝고 깨끗한 법을 알지 못하네.

“사리자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여래의 불가사의한 대비의 법이라 한다. 믿음에 머무르는 보살은 이 법에 대한 말을 들으면 마땅히 깨끗한 믿음을 내어 분별을 초월하고 온갖 의혹을 떠나야 하며, 다시 몸과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