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54권
불본행집경 제54권
수 천축삼장 사나굴다 한역
55. 우바리인연품 ②
“이때 그 두 친구는 벽지불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걸림 없이 노니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났다. 그들은 기쁨이 온몸에 가득 차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합장하고서 존자 벽지불의 발에 정례하여 이런 원력을 세웠다.
‘원하건대 미래세에 항상 이런 스승이나 더 나은 분을 만나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법을 듣고 얼른 이해하며 악한 길에 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빌고 나자 다른 한 사람은 다시 이렇게 빌었다.
‘원하건대 이 공덕의 힘을 의지하여 미래세에 항상 큰 가문인 바라문 집에 나서, 네 가지 베다와 60가지 온갖 기술을 모두 익혀서 지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게송을 읊었다.
곧은 마음뿐만 아니라 바른 믿음을 품지 않는다면
어찌 최상의 복전(福田)이라 할 수 있으리.
원컨대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하여
또 이런 벽지불을 만나고자 하노라.
그 두 사람은 목숨이 다한 뒤에, 한 사람은 바라나성 찰리 큰 가문에 태어나 왕위를 이어 범덕이란 왕이 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바라문의 청정한 집안에 태어나서 우파가(優波伽)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는 모든 논(論)에 해박하였다.
그런데 이 청년 우파가에게는 마나비가(摩那毘迦)라는 이름의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가장 어여뻐 그의 미모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았다. 남편인 우파가는 한없는 사랑과 공경을 쏟았으며 잠깐이라도 아내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마나비가는 사소한 일로 인하여 마음에 미움과 원망을 품더니 끝내 남편 우파가와는 말을 주고받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자 우파가는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제 내 아내 마나비가는 나와 말을 주고받지 않는구나. 결국 이렇게 목소리까지 듣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 후 마나비가는 여름 넉 달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남편인 우파가에게 말하였다.
‘여보, 어서 시장에 가서 몸에 바르는 향과 가루향과 꽃 등을 가장 좋은 것들로 사오세요. 가을철 넉 달이 이제 이르러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5욕락을 즐기니 우리도 몸을 치장하고 5욕락을 즐깁시다.’
청년 우파가는 이 말을 듣자 그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올라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아내 마나비가가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 이렇게 나에게 말을 건네었을까?’
그런데 우파가에게는 일찍이 다른 마을 사람에게 빌려준 금화 한 닢이 있었다. 그래서 태양 볕이 대지를 달구어 대지의 빛깔이 마치 붉은 닭처럼 보일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달아오르는 한 낮에 그는 집을 나와 돈을 꿔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마음이 탐욕에 사로잡혀 입으로 음탕한 노래를 불렀다.
바로 그때 왕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누각에서는 범덕왕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 홀연히 들려오는 5욕에 물든 음탕한 노랫소리에 그만 왕 자신도 욕망이 솟구쳤다. 그 게송이란 이러했다.
어떤 이는 본래 습기(習氣)를 말미암아서
어떤 이는 일에 따라 정욕이 움직이니
연꽃이 물에서 피어나듯이
이 색욕에 애착하고 물듦도 그와 같네.
이런 음탕한 노래를 듣게 된 범덕왕은 문득 놀라며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토록 뜨거운 한 낮 시간에 욕망에 물들어 이런 음탕한 노래를 부르는가?’
이렇게 생각하고서 창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뙤약볕으로 대지가 이글이글 달아오른 거리를 우파가가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곧 한 대신을 불러 명령하였다.
‘경은 빨리 나가서 저기 노래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나에게 데려 오너라.’
그는 명령을 받고 왕에게 아뢰었다.
‘명령을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우파가를 따라가서 그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보시오, 젊은이, 대왕께서 그대를 부르시니 어서 갑시다.’
순간 우파가는 겁에 질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생각하였다.
‘대체 무슨 일인가? 내가 범덕왕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를 겁에 질리게 하는가?’
신하가 우파가를 범덕왕에게 데리고 가자 왕은 그를 보자마자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애정을 품게 되자 그를 향해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한낮이라 햇볕이 불같이 타올라
붉게 달아오른 대지가 붉은 닭과 같은데
그대 지금 음욕에 빠져 노래부르면서도
어찌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는가.
햇볕이 두루 비추어 델 듯이 달아올라
땅 위의 모래마저도 녹일 정도로 뜨겁구나.
너 이제 음욕에 빠져 노래부르면서도
어찌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는가.
그러자 청년 우파가는 곧 게송으로 범덕왕에게 대답하였다.
대왕이여, 지금 덥지 않습니다.
하늘의 햇볕이 아무리 내리쪼여도
지금은 이익을 얻을지 못 얻을지만 생각하니
이것이 괴로움 중에서도 큰 괴로움입니다.
햇볕이 비록 불같이 내리쪼여도
이런 것쯤 그다지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온갖 일들을 경영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범덕왕은 청년 우파가의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우파가여, 그대는 지금 어떤 일을 경영하기에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는가?’
우파가가 자기 사정을 범덕왕에게 자세히 이야기하자 왕은 우파가에게 말하였다.
‘우파가여, 그만두어라. 그곳에 가지 말아라. 내 이제 그대에게 금전 두 닢을 주겠다.’
왕은 그에게 돈을 주었다. 그러나 우파가는 범덕왕에게 돈을 받고 나서 다시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대왕이여, 비록 대왕께서 두 닢을 주시긴 하였습니다만, 저는 지금 대왕에게 한 닢 더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대왕께서 주신 돈이 금전 세 닢이 되면 저는 저 마을에 가서 한 닢을 더 채워 네 닢을 만들어서 제 아내 마나비가와 함께 가을철의 5욕락을 즐길 것입니다.’
그러자 범덕왕이 우파가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가지 말아라. 내 이제 그대에게 여덟 닢을 주겠다.’
왕이 곧 돈을 내어주자 우파가는 여덟 닢의 금전을 받아든 뒤에 또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훌륭하신 대왕이여, 원하옵건대 크게 기뻐하소서. 이제 대왕에게 다시 한 닢의 금전을 청합니다. 그래서 금전 아홉 닢이 되면 저 마을에 가서 제 힘으로 한 닢을 받아 열 닢을 만들 것이며, 이렇게 하여 저는 마나비가와 가을철의 5욕락을 누리고자 합니다.’
범덕왕은 다시 청년 우파가에게 말하였다.
‘그만두어라. 그곳에 가지 말아라. 내 이제 너에게 금전 열여섯 닢을 주겠다.’
이렇게 하여 왕이
금전 열 여섯 닢을 주자 그는 돈을 받고 나서 또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훌륭하신 대왕이여, 크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대왕에게 금전 열여섯 닢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한 닢만 더 주시면 열일곱 닢이 될 것이요, 또 마을에 가서 제 스스로 한 닢을 받아 열여덟 닢을 만들면 이런 인연으로 저는 마나비가와 5욕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이때 범덕왕이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 청년 우파가여, 그만두어라. 그곳에 가지 말라. 내 이제 그대에게 32전(錢)의 돈을 주겠다.’
그는 그 돈을 받고 나서 또 왕에게 아뢰었다.
‘착하신 대왕이여, 원컨대 크게 기뻐하소서. 저는 이미 왕에게 돈 32매(枚)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장만 더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저 마을에 가서 제 힘으로 한 장을 더 받아 모두 34장을 만들어서 마나비가와 함께 가을철에 5욕락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범덕왕은 또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 우파가여, 그만두어라. 그곳에 가지 말아라. 내 그대에게 64전(錢)의 돈을 주겠다.’
우파가는 그 돈을 받고 나서 또 왕에게 아뢰었다.
‘훌륭하신 대왕이여, 원하옵건대 크게 기뻐하소서. 저는 이미 대왕에게서 64전의 돈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1전만 더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저 마을에 가서 제 힘으로, 1전을 받아 모두 66매(枚)의 돈을 만들어 그것으로 제 아내 마나비가와 함께 가을철의 5욕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그러자 범덕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 청년 우파가여, 그만두어라. 그곳에 가지 말아라. 나는 이제 그대에게 백 전의 돈을 주겠다.’
우파가는 백 전을 받고 나서 또 아뢰었다.
‘훌륭하신 대왕이여, 원컨대 크게 기뻐하소서. 나는 지금 대왕에게 돈 백 매를 얻었습니다만
1전 더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저 마을에 가서 다시 1전을 받아 모두 102전의 돈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아내 마나비가와 함께 가을철의 5욕락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자 범덕왕이 다시 또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그만두어라. 그곳에 가지 말아라. 내 다시 그대에게 고을 하나를 내려 주고 봉록을 베풀겠다.’
그러나 그 바라문은 더 좋은 것을 탐내어 그것을 얻으려고 여러 번 왕에게 갔으며 마침내 왕은 가장 좋은 고을을 택해 그에게 봉해 주었다. 마침내 봉읍을 얻게 된 그는 부지런히 힘써 노역(勞役)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마치 머슴처럼 그 왕을 섬겼다. 그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행동이 부드럽고 하는 일이 모두 왕의 뜻에 맞았고, 뜻과 행동이 모두 반듯하고 단정하였다. 이렇게 왕을 섬기니 결코 왕에게서 질책을 받거나 미움을 받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왕의 안색을 살피니 범덕왕은 기뻐해 마지않았다.
그후 다시 왕은 우파가에게 나라의 반을 나눠주어 다스리게 하고, 왕의 창고도 반을 나누어 그에게 주었다. 우파가 바라문은 이런 은총을 받아 5욕락을 모두 갖추어 누리니 조금도 모자라거나 아쉬운 것이 없었다.
이렇게 그는 무슨 일이든 전부 왕을 위하여 지휘 감독하였으며, 그 바라문이 집을 나와 왕궁에 오면 왕은 항상 그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날 범덕왕이 우파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자, 우파가는 왕이 잠든 것을 보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떻게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어 위세를 함께 부리고, 하나의 창고를 가지고 두 사람이 쓸 수 있으랴. 내 이제 범덕왕의 목숨을 끊어야겠다. 만약
그를 죽이면 나만이 왕위를 차지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우파가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칼을 잡으려 하다가 다시 생각하였다.
‘이 범덕왕은 예전부터 나에게 커다란 이익을 베풀어주었고 자기 나라의 반을 나에게 나누어주고 함께 다스리게 하였고, 모든 창고도 반을 나누어주었는데 내가 지금 그런 사람을 죽인다면 이것은 은혜도 의리도 없는 자가 할 짓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하였다.
‘어떻게 두 사람이 한 곳에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또한 두 사람이 함께 같은 창고의 재물을 쓰겠는가.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렇게 세 번을 생각하고 이내 후회하였다.
‘내가 만약 그를 죽이게 되면 틀림없이 나는 은혜와 의리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침내 우파가는 소리 높여 통곡을 하고 말았다. 난데없는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범덕왕은 우파가에게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슨 일로 이런 큰 소리를 내는가?’
우파가는 범덕왕에게 그 사연을 말하였다. 그러나 범덕왕은 우파가의 이런 일을 진심으로 믿으려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파가여, 그대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하지만 우파가는 끝까지 범덕왕에게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지금 나의 말을 믿으십시오. 나는 정말 이런 나쁜 마음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우파가는 또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지금 느닷없이 이런 나쁜 마음을 낸 것은 무슨 일을 인연하였기 때문일까?’
그가 올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한 뒤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이런 나쁜 마음을 내게 된 것은 5욕락을 위하고 왕위를 위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 왕위를 탐내지 않고 또한 세상의 쾌락도 탐내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나에게 이런 나쁜 마음이 생겼으니, 나는
이제 집을 버리고 출가해야만 한다.’
그리고 곧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저는 이제 집을 버리고 출가할까 합니다.’
그러자 범덕왕은 우파가에게 말하였다.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내 이미 그대에게 나라를 반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창고도 반을 나누어주지 않았는가. 지금 나에게는 오직 그대만이 심복이요, 그 어떤 사람도 그대만한 이가 없다. 만일 그대가 출가한다면 내 마음은 불안하고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파가는 왕에게 아뢰었다.
‘어지신 대왕이여, 제발 저의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출가할 것입니다. 법을 향한 저의 행동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범덕왕은 우파가에게 말하였다.
‘굳이 그렇다면 그대 좋을 대로 하여라.’
한편 당시 파라나성(波羅㮈城)에는 옹기장이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출가하여 선인(仙人)의 행을 행하며 그 성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 선인은 큰 위덕이 있어 이미 다섯 가지 신통을 이루어 손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졌다. 우파가는 그 선인을 따라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출가한 뒤에는 용맹정진하여 곧 4선(禪)을 성취하고 또 5신통을 얻었으며, 큰 위력이 있어 손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졌다.
범덕왕은 우파가가 집을 버리고 출가하여 대선인의 경지를 이루어서 큰 위덕이 있고, 또 손으로 해와 달을 만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은 이런 소식을 듣자 빙그레 웃으며 궁 안으로 들어가 궁궐의 모든 사람들에게 게송을 읊었다.
우파가는 선을 짓기 오래지 않아
이미 크나큰 이익의 과보를 얻었네.
착하신 그 선인은 사람 몸을 얻어
5욕락을 버리고 출가행을 닦네.
궁궐의 사람들은 범덕왕의 이런 게송을 듣고 나서 그 마음이 한결같이 근심에 잠기고 즐거움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범덕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굽어살피소서. 그 사람은 본래 도박꾼이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걸식하여 그것으로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그 바라문은 위신력이 줄어들자 출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이시여, 지금 저 사람처럼 집과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는 일은 배우지 마소서.’
그때 범덕왕에게 항가파라(𠷐伽波羅)라는 이발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본래부터 범덕왕의 심복이었다. 범덕왕은 그 이발사를 불러 명령하였다.
‘항가파라야, 그대는 지금 내 머리와 수염을 다듬어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곧 잠이 들었다. 이발사 항가파라는 왕이 잠든 동안 왕의 머리와 수염을 다 깎았다. 깨끗하게 다듬었는데도 범덕왕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뒤에 왕은 잠이 깨어 이발사 항가파라에게 말하였다.
‘내 이미 명을 내려 너에게 내 머리와 수염을 깎으라고 하였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이발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항가파라는 범덕왕에게 아뢰었다.
‘저는 이미 이발을 마쳤습니다. 다만 대왕님께서 잠이 드셔서 깨어나지 못하신 것입니다.’
범덕왕은 이 말을 듣고 거울을 들어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깨끗하게 머리칼과 수염이 이발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 항가파라에게 명하였다.
‘그대는 내가 다스리는 가장 좋은 고을을 받으라. 내 그대에게 주리니 마음껏 즐겨라.’
그러자 이발사 항가파라는 범덕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궁내에 있는 대왕님 권속들과 자세히 의논한 뒤에 대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왕에게 절을 하고 궁을 떠났다. 그 이발사 항가파라는 본래 왕궁 출입이 자유로웠으므로 곧 궁으로 들어가
궁궐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고을을 내려주시겠다고 하셨는데 모든 후비(后妃)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을을 받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러자 후비들은 항가파라에게 말하였다.
‘항가파라여, 지금 그대가 무엇 하러 왕의 가장 좋은 고을을 가지려 하는가? 우리가 지금 그대에게 금은과 같은 진귀한 보석들을 넉넉히 주겠다. 그러니 그저 우리가 그대에게 부탁하는 일을 들어주지 않겠는가?’
이발사 항가파라가 궁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지금 무슨 일을 나에게 해결하게 하려 하십니까?’
그녀들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얼마 전부터 궁에 들어오시면 언제나 이런 게송을 읊었다.
우파가는 선을 짓기 오래지 않아
이미 크나큰 이익의 과보를 얻었네.
착하신 그 선인은 사람 몸을 얻어
5욕락을 버리고 출가행을 닦네.
우리들은 왕의 이 게송을 듣고 언제나 혹시라도 대왕께서 왕위를 저버리고 출가하실까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 착하고 착한 항가파라여, 그대는 지금 왕에게 가서 이 게송의 뜻이 무엇인지 대신 여쭈어보아라.’
그리하여 항가파라는 범덕왕 처소에 나아가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저에게 가장 좋은 고을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지금 저에게는 그런 것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대왕께서 항상 궁 안에 들어가시면 후비들 앞에서 읊으시는 다음의 게송을 알고자 합니다.
우파가는 선을 짓기 오래지 않아
이미 크나큰 이익의 과보를 얻었네.
착하신 그 선인은 사람 몸을 얻어
5욕락을 버리고 출가행을 닦네.
어지신 대왕께서는 저를 위하여 이 게송의 뜻을 말씀해주소서. 그것은 어떤 이치를 지닌 게송입니까? 지금 저는 대왕에게 이런 원을 빌 뿐입니다.’
범덕왕은 이발사 항가파라에게 말하였다.
‘나는 청년 우파가가 나라의 반을 다스리던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선인이 되어, 큰 위력이 있어서 손바닥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진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오로지 5욕락에 어지러이 취하고 탐닉하며 지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를 몹시 부러워하고 있으며 자주 궁 안에 들어가 그렇게 게송을 읊었던 것이다.’
이발사 항가파라는 이 말을 듣고 곧 궁에 들어가 후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후비들께서는 대왕이 출가할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왕은 결코 출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 후비들은 이발사 항가파라의 말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차오르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온갖 보석들로 자신들의 몸을 치장하고 난 뒤에 항가파라에게 말하였다.
‘항가파라여, 이제 우리는 이 보석들을 모두 그대에게 주겠으니, 그대는 이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른 일들은 하지 말아라.’
항가파라는 이런 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저 우파가는 이미 이런 나라의 반을 다스리는 왕위도 버리고 출가하였고, 지금 범덕왕도 그를 부러워하는데, 내 이제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게 만들지 않을 것인가. 그런데 이 후비들은 온갖 보석들을 나에게 베풀고 있다. 내가 만약 이 후비들의 뜻을 따른다면 일은 반드시 좋지 못하리라. 나 또한 버리고 출가하는 것이 옳으리라.’
항가파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범덕왕의 처소에 나아가 아뢰었다.
‘대왕이여, 먼저 저에게 그런 일을 허락하셨는데 저는 지금 모두 버리고 출가하고 싶습니다.’
범덕왕은 물었다.
‘항가파라여,
그대는 지금 누구에게 출가하려 하는가?’
항가파라는 대답하였다.
‘저는 저 우파가에게 출가하고자 합니다.’
범덕왕은 일렀다.
‘항가파라여, 그대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것을 따라서 하여라.’
그리하여 항가파라는 스스로 머리와 수염을 깎고 우파가 선인의 처소에 나아가 출가하였다. 출가하고 한 뒤에 그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침내 4선(禪)을 성취하고 또 5신통을 얻었으며, 큰 위신과 큰 위덕이 있어 또한 해와 달을 어루만졌다.
범덕왕은 이미 항가파라가 출가하여 큰 신선이 되었고 큰 위력이 있어 또 손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진다는 말을 듣고, 그를 우러르며 부러워해 마지않다가 그를 만나고자하여 모든 대신들에게 말하였다.
‘대신들이여, 나는 지금 그 선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고자 한다.’
그러자 대신들은 일제히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여, 그럴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지금 친히 그 사람에게 나아가시는 일은 당치 않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그 선인들을 불러오게 하소서.’
그러나 범덕왕은 대신들에게 말하였다.
‘경들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옛날부터 그런 법은 없었다. 모든 선인들을 내 맘대로 불러서 오게 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지금 직접 그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법다운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선인들은 큰 복전(福田)이므로 공양을 받기에 족하니, 반드시 우리들이 직접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범덕왕은 스스로 위엄과 덕을 갖추고 수레에 올라타고 화려하게 치장한 5백 대의 수레를 좌우에서 둘러싸게 하고 5백 명의 모든 대신들과 같이
파라나성을 나와서 우파가 청년이었던 선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스스로 그 세계를 빛내고자 하였다.
이때 항가파라 선인은 멀리서 왕이 오는 것을 보고 왕을 맞으며 말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범덕이여, 참으로 먼 곳까지 오셨습니다.’
그러자 5백 명의 대신들은 그 항가파라 선인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너는 그야말로 하천하고 음탕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몸이다. 더럽기 그지없어 언제나 때를 씻는 처지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대왕의 이름을 부르느냐?’
범덕왕이 그 신하들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선인의 법이 그런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법칙인 것이다. 단 이 선인은 계행(戒行)을 지키고 있으며 위대한 위신력이 있다.’
그리고 범덕왕은 곧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게송을 읊었다.
경들은 이 선인을 원망하지 말아라.
이 선인은 수행을 완전히 갖추어서
모든 고행을 다 수행하였기에
일체 괴로움과 두려움을 건넜다.
마음에 모든 악함을 이미 버렸기에
이제 이발사와 옹기장이가 아닌 것이다.
항가파라는 이미 고행을 마쳤고
우리들을 항복한지라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지금 참는 힘을 얻은 그대들을 보자니
모든 감각기관 항복하여 과위를 이루었네.
모든 천상과 인간이 공경히 받드니
천상과 인간 중에 가장 높다네.
그리고 범덕왕과 궁 안의 모든 채녀들이 먼저 그 선인의 발에 정례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자, 5백 명의 대신들도 차례로 그 선인의 발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난 뒤에 다시 항가파라 선인의 발에도 절을 하였고 그 다음에는 역시 옹기장이였던 선인의 발에도 절을 하였다. 범덕왕은 한쪽에
앉아서 선인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들이여, 몸이 건강하고 편안하십니까? 생활하시는데 피로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여러 선인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 선인들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우리들은 지내기 걱정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옥체가 편안하십니까? 권속들과 대신과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도 두루 평안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 선인들은 범덕왕을 위하여 법을 설하여 교화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공덕을 더하게 하였다. 이렇게 범덕왕은 그 선인들의 설법 교화를 받아 마음이 즐거워지고 공덕이 더욱 불어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선인들에게 절을 하고 자신의 본래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시 여러 비구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들은 마음에 의심이 있으리니 그 때의 우파가가 누구였는가 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는 바로 나였다.
너희 비구들 중에 어떤 이는 의심을 가질 것이니 그 때의 선인 항가파라 이발사가 누구였는가 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 우바리 비구가 바로 그였다.
너희 비구들 중에 또 어떤 이는 의심을 가질 것이니 그때 범덕왕이 누구였는가 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가 바로 지금의 수두단왕이었다.
너희 비구들 중에 어떤 이는 의심을 가질 것이니 그때 5백 명의 모든 대신들이 누구였는가 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라. 바로 지금의 이 오백 비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비구들이여, 그때 우바리 비구도 나로 인하여 5백 명의 대신들에게 공경과 예배를 받았고
범덕왕에게도 예배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도 또한 그렇게 나로 인하여 5백 비구들과 수두단왕의 예배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만약 나의 성문(聲聞) 제자들 가운데 계율을 지니는데 가장 으뜸가는 사람은 바로 우바리 비구임을 알아야 한다.”
이때 비구들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우바리는 옛날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그 업보를 타고 이발사라는 하천한 집에 태어났을까? 그리고 어떤 업을 지었기에 그 업보를 타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아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으며, 지금 부처님께서 그를 수기하여 당신의 성문 제자들 가운데서 계율을 잘 가지는 사람은 이 우바리 비구라고 수기하시는 것일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 장로 우바리는 옛날 무슨 업을 지었기에 그 업보를 타고 이발사라는 하천한 집안에 태어났으며, 또 무슨 업을 지었기에 그 업보를 타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곧 부처님께서 그에게 수기를 주시기를, 당신의 성문 제자들 가운데서 계율을 갖는데 으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비구들이여, 생각건대 지나간 아주 오래 전에 이 성에 이발사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이발사 집안의 딸을 맞아 아내를 삼고, 그 뒤 오래지 않아서 한 아들을 낳았었다.
그 이발사는 곧 병을 얻었는데 비록 치료를 하였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그 병 때문에 목숨을 마치고 말았다. 그 이발사가 죽자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을 이발사인
친정 오빠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부탁하였다.
‘이 아이는 오빠의 조카입니다. 그래서 이제 맡기니 제발 이 아이에게 자기 부친의 본업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그 이발사는 누이동생의 말을 듣고 그 아이를 맡아서 부친의 본업을 가르쳤다.
그런데 외삼촌인 그 이발사는 언제나 왕궁에 있으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국왕의 머리와 수염을 깎아 주었으며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부 사람들의 이발을 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왕은 영을 내려서 그에게 흰 코끼리 한 마리를 주어 마음대로 타게 하고, 또 금으로 된 통을 주어 면도칼과 그 밖의 것을 넣게 하였다.
그리고 또 명령을 내리기를 ‘무릇 부처님께서 없는 세상에는 벽지불(辟支佛)이 있는데 마치 무소와 같이 홀로 다니며 나올 때에는 마땅히 이익을 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 벽지불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매우 길었다. 어느 날 벽지불은 이발사가 있는 곳으로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착한 이여, 부디 나의 머리와 수염을 깎아주시오.’
그러자 이발사는 벽지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훌륭하신 대선(大仙)이시여, 그럼 내일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아침 일찍 오십시오. 당신의 머리와 수염을 꼭 깎아 드리겠습니다.’
존자 벽지선인은 이 말을 듣고 그날은 돌아갔다가 그날 밤이 지나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서 그 이발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착한 이여, 이제 나의 머리와 수염을 깎아주오.’
그런데 이발사는 다시 벽지불에게 말하였다.
‘착하신 대선이여, 그럼 저녁때에 오십시오. 내가 꼭 깎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해가 서쪽에 기울 때 오라고 해놓고는 다시 아침에 오라 하고, 만약 아침 일찍 가면 저녁때에 오라 하는 등 이렇게 아침에도
이발해주지 않고 저녁때에도 이발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린 조카는 존자 벽지불이 아침에도 오고 혹은 해가 저물었을 때도 오는 등 매일 그렇게 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 존자 벽지불에게 물었다.
‘존자 벽지불 선인이시여, 무슨 이유로 아침이나 저녁마다 항상 이곳에 오시는 것입니까?’
벽지불은 동자에게 지난 사연을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자 동자는 선인에게 말하였다.
‘저의 외삼촌은 결코 선인의 머리를 깎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왕궁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자 교만한 마음이 생긴 까닭입니다. 그러니 제가 지금 선인을 위하여 이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린 조카는 곧 선인에게 이발을 해주었다. 그러자 존자 벽지불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지금 이 동자는 큰 공덕을 짓는구나. 내 이제 동자를 위하여 공덕의 일을 빛나게 보여 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동자에게 말하였다.
‘너 동자야, 만약 때를 알거든 반드시 나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거두어서 가지고 있거라. 그러면 너는 장차 큰 이익을 만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치 기러기가 두 날갯죽지를 펴듯 신통력으로써 문득 날아 올라 허공을 타고 갔다.
그러자 동자는 청정한 마음이 생겨나 벽지불의 머리카락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벽지불을 향하여 우러러 두 손을 합장하여 정례하고 이런 원력을 세웠다.
‘원하건대 나는 미래세에 이런 벽지불 존자나 혹은 더 나은 분을 만나고, 그 세존의 설법을 듣는 대로 빨리 다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나는 악도에 나지 않기를 바라며, 세세생생에 항상 이런 이발사가 되어 복전(福田)이 되고, 이런 성자를 공양하고 섬길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바로 이때 그 성의 궁 안에서는 국왕이 정전에서 모든 대신들에게 에워싸여 정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벽지불이 허공을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대신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이여, 지금 매우 길상스럽고 이롭습니다. 사람의 몸을 잘 얻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큰 복전이 나셨습니다.’
왕도 곧 그 벽지불을 우러러보고 모든 신하들에게 일렀다.
‘이 벽지불의 머리와 수염을 깎은 이는 크게 상서로운 이익을 지었도다.’
그러자 왕의 이발사가 그 옆에 있다가 이렇게 아뢰었다.
‘제가 아니면 이런 선인의 머리를 누가 깎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조카인 동자가 이 말을 듣고 나서 곧 왕에게 나아가 이렇게 고하였다.
‘대왕이시여, 굽어살피소서. 저의 외삼촌은 지금 허무맹랑한 말을 합니다. 저의 외삼촌은 처음부터 그 분의 이발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 선인의 머리와 수염을 깎은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진짜로 이발을 해드린 사람을 찾자면 바로 저입니다.’
그러자 외삼촌인 왕의 이발사는 어린 조카를 꾸짖었다.
‘이 어리석은 아이야, 네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분의 머리를 깎았단 말이냐?’
동자는 벽지불의 머리털을 내어 대중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선인의 머리카락입니다. 제가 지니고 다니니 모두들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 왕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그 이발사에게 말하였다.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아, 너는 나에게서 이런 힘을 가졌는데 오늘 무슨 이유로 나를 속이려 하느냐. 어서 이 나라를 떠나라. 내 국토 안에서 살지 말아라.’
그리고 흰 코끼리와 이발 기구들, 또 봉록을 빼앗아 동자에게 주고 명령하였다.
‘오늘부터 너는 항상 나의 머리털과 수염과 손톱을 깎아라.’
동자는 곧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의 명을 받들어 거행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항상
대왕을 위하여 머리와 수염과 손톱을 다듬어 드리겠습니다.’
그후 그는 세상 수명을 따라 살다가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인연하여 세세 생생토록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서 인간에 이르고 인간에서 천상에 이르며 이렇게 두 곳을 오가다가 훗날 바라나성의 한 이발사의 집에 태어났다. 어린 그의 모습은 매우 단정하고 고와서 보는 사람은 싫증을 내지 않았다. 동자의 부모는 그를 잘 길렀는데 자라면서 지혜가 생기자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가르쳤다.
바로 그때 가섭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으니, 이 다타아가도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는 위대한 스승이 되어서 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ㆍ불세존이라 불렸다.
이때 가섭 세존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는 법바퀴를 순서대로 또는 역순으로 굴리신 뒤였으며, 법 수레의 본래 소원을 완전하게 갖추어 받아 가장 날카롭고 뛰어난 대장부의 뜻을 이루었고, 한량없는 수억 수천만의 중생들에게 활짝 핀 연꽃처럼 열어 보이셨으며 착한 길로 인도하셨다. 그 당시 가섭 세존은 바라나성에 의지하여 수행하셨으며 옛 선인들이 거처하던 곳인 녹야원에서 2만 명의 비구들과 함께 머물고 계셨다.
이때 그 아버지인 이발사는 자주 녹야원으로 가서 비구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그러자 이발사의 어린 아들도 걸을 수 있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서 가람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구들이 여러 법을 설하거나 강론할 때
그 어린 아이도 듣게 되었는데 아이는 율(律)을 강론할 때는 어떤 것은 들을 수 있었지만 어떤 부분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자 어린 아이는 비구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좋은 말씀에서 나는 어떤 것은 들을 수 있고 어떤 것은 들을 수 없는 것입니까?’
비구들은 대답하였다.
‘동자야, 이런 법은 비구들의 비밀한 일이다. 구족계를 받지 않으면 모두 듣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마음에 근심을 품었다.
‘어찌 하면 내가 속히 출가하여 좋은 말씀을 다 들을 수 있을까?’
훗날 동자는 율사(律師)에게 출가를 허락해주시기를 빌어서 구족계를 받고, 비구들을 따라 계율을 지송(持誦)하며 법에 따라서 수행하였다. 비록 그렇게 수행하였지만 그는 출세간의 지혜를 증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런 그가 훗날에 병을 얻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는 목숨을 마칠 때에 이르자 또다시 이렇게 원을 세웠다.
‘가섭 여래ㆍ다타아가도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께는 호명(護明)이라는 보살이 한 분 계시는데 여래께서 그 분에게 미래세에 중생의 수명이 백 세가 될 때 마침내 성불하리니 이름을 석가모니 다타아가도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라 하리라고 수기를 하셨다. 이제 나는 장래 석가모니를 만나서 원하는 대로 그 가르침 가운데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그 세존의 제자들 가운데 계율을 지키는 자로는 내가 으뜸이 될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내 스승님께서 가섭 부처님의 계행 제자 가운데 으뜸가는 사람이듯이 나 또한 그렇게 그때 석가 여래의 법의 가르침 속에서 계행을 행하는 제자로는 으뜸이 되리라.’
그 사람은 즉시 목숨이 다하여 곧 천상에 났으며, 나아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최후의 몸으로
가비라성의 이발사 집안에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지금의 이 우바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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