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 1권
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 제1권
실역인명(失譯人名)1)
이태승 번역
처음의 게를 세워서 말하기를 “가섭이 정법(正法)의 근본을 사유한다”라고 한 것은, 소위 경법(經法)을 사유하는 데 언교(言敎)가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가섭은 비교함으로써 그 많고 적음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법을 비교하는 것은 열 마리의 당나귀로부터 시작한다. 열 마리 당나귀의 힘은 한 마리 범낙타(凡駱駝)의 힘과 같지 않다. 열 마리 범낙타의 힘은 한 마리 범상(凡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 마리 범상은 하나의 세각상(細脚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세각상은 하나의 도식상(盜食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도식상은 하나의 연화상(蓮華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연화상은 하나의 청련화상(靑蓮華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청련화상은 하나의 홍련화상(紅蓮華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홍련화상은 하나의 백련화상(白蓮華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백련화상은 하나의 설산상(雪山象)의 힘과 같지 않다. 열의 설산상은 하나의 향상(香象)의 힘과 같지 않다. 당나귀로부터 향상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나누어 이와 같이 8만 4천의 향상에 비할 정도로, 그 가죽의 겉과 속에 경을 쓰고 그와 같은 수만큼 향상에 실려 있는 것이 아난이 들은 것이며 알고 있는 것이다. 대략 비교하여 그 수를 알아야 한다. 그 하나하나를 문자로 나타내려고 하는 자는 수명을 다하도록 능히 다할 수 없다.경법(經法)을 사유하는 것은 실로 광대한 것이다.
어떻게 천하에 유포시켜야 오랜 세월 동안 중생으로 하여금 법의 혜택을 입도록 할 수 있겠는가? 지극한 이치를 깊이 생각하여 누가 능히 법을 가릴 수 있는가? 오직 아난만이 능히 모을 수 있을 뿐이다.가섭이 건추(揵槌)를 울려 대중을 모으자 바로 8만 4천의 모든 아라한이 명(命)을 받들어 와서 모였으니, 그들은 번뇌를 다하였고, 모두 구해탈(俱解脫)을 이룬 이들이었다. 이 모든 현성(賢聖)을 부른 까닭은, 그들이 모두 멸진정(滅盡定)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멸진정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현세에 복을 얻게 하고 그를 고난과 재액에서 건져준다.대천세계의 모든 무착(無著:아라한) 등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모두 3도(道)를 없애며, 각각 하나씩 증가한다. 지금 단지 이근(利根)과 구해탈을 지녀 능히 멸진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는 까닭에 복전(福田)이라 일컫는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옛날 제석천(帝釋天)이 복이 다하여 수명을 마치려고 할 때, 다섯 가지 서응(瑞應)이 일어나니, 마음이 두려워져 도움을 구하고자 했다. 곧바로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도움을 구하고자 부처님의 관대한 은혜를 생각하였지만 두려움은 풀리지 않고 목숨은 위태로웠다. 사리불ㆍ목건련 등을 떠올렸지만 능히 목숨을 구할 수 없을까 걱정되었다. 오직 대가섭만이 멸진정의 힘으로써 그 위급함을 구할 수 있었기에 곧 가섭의 처소로 갔다. 그때 가섭은 가난한 집에 이르러 복으로 제도하고자 하였다.제석은 ‘곧바로 천신(天身)을 나타내면 두려워하여 나의 보시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곧 길 옆에 풀로 지은 작은 집을 지어 놓고 여윈 병자의 모습을 하였다. 가섭이 걸식하자 병자는 곧 손을 뻗어 음식을 보시했다. 가섭이 발우로 음식을 받자 그것이 변하여 감로가 되니, 곧 허공에 천신을 나타내었다.가섭이 말했다.
“왜 거짓말로써 나를 속이느냐?”
제석천이 말했다.
“망어가 아니고, 저는 지성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석천으로서 다섯 가지 서응이 나타나 목숨이 끊어지려는 까닭에 와서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저의 목숨을 구해주십시오.”
가섭은 곧 침묵으로써 그것을 허락했다.
제석천은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법을 듣고, 곧바로 깨달았다.
부처님께서 제석천에게 “너는 이미 죽음을 향하고 있지만, 다시 살아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다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이것은 곧 가섭의 멸진정에 의한 힘에 감응한 것이다.가섭이 멸진정의 힘을 사용하는 데 가장 뛰어난 까닭은 가섭이 본래 벽지불이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벽지불의 법은 설법으로 교화하지 않고 오직 신족(神足)으로 감동시켜 삼매를 현현시킨다. 대가섭이 비록 아라한을 증득하였지만 본식(本識)은 여전히 존재한다. 앞서 언급한 8만 4천 대중의 덕은 감동시키는 공력(功力)이 가섭과 같다.아난이 물었다.
“가섭은 본래 벽지불인 까닭에 그 뛰어남을 칭찬하지만, 이들 나한들도 벽지불인가?”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비록 벽지불은 아니더라도 두루 멸진정을 닦아 그 힘은 같다. 이러한 까닭에 가섭과 대중 스님들을 중생의 복전이라고 말한다.”게(偈)에서 ‘모두 아라한으로 마음이 해탈하였다’고 한 것은 구해탈을 얻은 것이다.게에서 ‘이미 계박[縛著]을 벗어나 복전에 처한다’라고 한 것은, 가섭이 불러 모은 8만 4천의 대중이 모두 구해탈을 얻어 멸진정으로써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현세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후에 열반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복전에 처한다고 한다.게에서 ‘4부(部)를 모으니’라고 한 것은 생략한 것이다. 이치에 응해 4부이며, 다시 인천(人天)에 8부가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찰제리ㆍ바라문ㆍ장자ㆍ사문ㆍ사천왕ㆍ삼십삼천ㆍ마왕ㆍ범왕, 이것이 8부이다. 따라서 모두 12부가 있다. 4부라고 말한 것은 대략 그 요점만을 든 것일 따름이다.‘모든 법은 깊고 깊어’라는 것은 12인연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을 위해 12인연의 지극히 깊고 미묘함을 말씀하셨다.
아난이 여쭈었다.
“이 인연에는 어떠한 깊고 묘한 것이 있습니까?”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깊고 묘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너는 또 전생에도 그것이 깊지 않다고 말했느니라.
옛날에 아수륜왕(阿須輪王)이 있었는데, 신장은 8천 유순, 상하의 입술 사이가 천 유순이었다. 왕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그 아이를 사랑하여 안아서 무릎 위에 놓았다. 바다의 깊이가 336만 리인데, 아수륜이 서면 꼭 배꼽에 해당했다.아이가 아버지에게 ‘바다가 얕으니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안 된다. 바다가 깊어 네가 빠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도 들어가고자 하니, 아버지는 그를 놓아두었다. 그러자 바다 밑에 빠져 허둥대고 무서워했다. 아버지가 곧 손을 뻗어 끄집어내어 말하기를 ‘너에게 안 된다고 말했지만 너는 믿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것은 무엇과 비슷한가?그때의 왕은 바로 나이고, 그 아이는 바로 너이다. 옛적에도 깊은 것을 믿지 않더니, 지금도 여전히 믿지 않는구나. 너는 단지 무명(無明)이 행을 연(緣)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37품을 알겠는가?”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에 네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중생 불가사의ㆍ세계 불가사의ㆍ용(龍) 불가사의ㆍ불(佛) 불가사의이다. 세계 불가사의로 인해 옛적에 만원자(滿願子)와 범지(梵志)가 함께 논쟁을 벌였다.범지가 스스로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연못가에 이르러 생각하다가, 네 종류의 군대가 연꽃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스스로 놀라 나의 눈과 연꽃이 실제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말해도 모두들 믿지 않았다. 마침내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본 것을 아뢰었다.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실제의 일로 허망한 것이 아니다. 아수륜이 네 종류의 군대를 일으켜 제천(諸天)과 싸운 것이다. 아수륜이 여의치 않자 퇴각하여 연꽃 구멍에 들어가 스스로 숨은 것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까닭에 세계 불가사의라 말한 것이다. 세계는 범천이 만든 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6천(天)이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범지가 또 말하였다.
“범천은 누가 만들었는가? 혹은 범천에게 아버지가 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는 곧 연꽃이다.”
또 물었다.
“연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우다연(憂陀延)의 배꼽으로부터 나왔다.”
“우다연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산차왕(散嵯王)으로부터 나왔다.”또 물었다.
“산차왕은 어느 성(姓) 출신인가?”
“찰제리 종이다.”또 물었다.
“범천은 바라문 종이다. 지금 찰제리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무엇인가?”“겁소(劫燒)의 때에 대략 특별한 것을 얻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가?”
이에 대답하였다.
“겁소의 때에 땅의 끝으로부터 위로 15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김없이 태워진다. 이렇게 가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16천 이상 33천이 존재한다. 이 사이는 비록 타더라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이것을 두고 말하지만, 다시 알지 못한다.”
이것이 세계 불가사의이다.무엇이 중생 불가사의인가? 더러는 말한다.
“겁소 이후에 물이 화처(火處)를 보충하고, 바람이 부는 데 따라 궁전이 지어지며, 아래의 땅은 비옥해진다. 광음천(光音天) 위의 모든 무리들이 장난치며 놀다 땅에 이르러 점차 땅의 비옥함을 맛보고는 몸이 무겁게 되어 다시 본래로 돌아가지 못한다. 음식을 많이 먹은 자는 변하여 여자가 되며, 점차 없어져 박병(薄餠)과 갱미(粳米)가 나타나게 되면 신족(神足)과 광명을 잃고 다시 또 사람이 된다. 선을 행하면 천(天)에 태어나고, 악을 행하면 3도(塗)와 5도(道)에 유전하며 항상 의지되는 것이 없다. 가령 한 사람의 근본 연유를 모두 남김없이 다 알려고 해도 오히려 알 수 없는데 하물며 어찌 일체 중생을 가히 생각하여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중생 불가사의이다.무엇이 용(龍) 불가사의인가? 구름이 일어나 비가 되는 것은 모두 용에 의한 것이다. 비는 용의 눈ㆍ귀ㆍ코ㆍ입으로부터 나오는가, 그 몸으로부터 나오는가,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가?
수미산에 의지해 다섯 가지의 천이 머물러 있는데 또한 능히 비를 뿌린다. 그러면 용의 비와 그 천의 비는 어떻게 다른가? 천의 비는 미세한 안개같이 내리는 것이다. 거칠게 내리는 것은 용의 비이다.무엇이 다섯 가지 천인가? 첫째는 곡각천(曲脚天)이요, 둘째는 정상천(頂上天)이다. 셋째는 방일천(放逸天)이며, 넷째는 요력천(饒力天)이며, 다섯째는 사왕천(四王天)이다. 아수륜이 군대를 일으켜 천과 싸울 때, 먼저 곡각천과 싸워 승리를 얻은 뒤에 정상천에 이르렀으며, 차례로 방일천과 사왕천, 나아가 33천에 이르렀다. 아래의 4천과 싸우려고 했을 때, 무기도 없이 비로써 적을 물리쳤다.두 종류의 비가 있는데 환희의 비와 성냄의 비이다. 조화롭게 내리는 비는 환희이고, 우레ㆍ우박ㆍ벼락을 동반하는 것은 성냄이다. 아수륜도 비를 내리고, 천도 비를 내리며, 용도 또한 비를 내린다. 각각 비를 내리는 이치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 까닭에 용우(龍雨)의 불가사의라 하는 것이다.불(佛) 불가사의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옛적에 부처님께서 정실(靜室)에 계셨다. 항하의 모래와 같은 수의 모든 범천이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부처님께서 어떠한 삼매에 계시는가를 알고자 했지만, 어떠한 삼매에 계시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신족 변현(變現)의 비밀스런 일은 2승(乘)으로서는 능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 하물며 범부임에랴.아난이 가섭에게 미루어 먼저 말하였다.
“상좌[耆年]는 중생을 위해 법을 펴는 것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장(尊長)은 오랫동안 배우고 아는 것이 많아 세존께 위촉받으셨으니, 장래의 중생을 위하고자 하는 까닭입니다. 정법이 오랫동안 세간에 머물게 하려 하셨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자리를 반분(半分)하여 명하셨습니다. 존자께서는 이미 승가 대중의 상좌이며, 또 지혜를 널리 감싸고 있으니, 오직 자비와 애민(哀愍)을 드리워 법보를 말씀하소서.”외국의 법사가 말하였다.
“가섭이 법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4변(辯) 가운데에 사변(辭辯)2)이 없었던 까닭이다.”
또 말하였다.
“본래 이 사람은 벽지불로서 단지 신족으로써 교화를 나타내었다. 처음에 법을 연설하지 않고, 가섭이 대답을 사양하며 스스로 ‘쇠하고 정기가 어두워져 잊는 것이 많다’라고 말하였다.”답하여 말하였다.
“4제(諦)의 진정한 법이 어찌 쇠망하겠는가? 비유하면 금강이 훼손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단지 생사는 4대에 증감이 있는 것일 뿐이다.”살바다가(薩婆多家)가 또 말하였다.
“9종의 나한에 퇴전하는 자가 있다. 어떠한 일로써 퇴전하는가? 네 가지 일이 있다. 즉 나이가 들어 노쇠해 가는 것, 질병으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 멀리 유행(遊行)하기를 좋아하는 것, 복용한 약이 잘못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일로 곧 잘못과 잊음이 있을 뿐이다. 진리의 미묘한 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가섭이 아난에게 권해 말하였다.
“그대는 지금 한창 때이다. 게다가 문지(聞智)와 등지(等智)3)가 있어 총지(總持)하여 잊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매일 경을 말씀하시어 항상 너에게 부촉하셨으니, 그대는 마땅히 경법(經法)을 선포하여야 한다.”어떻게 아난이 등지를 갖고 있음을 아는가? 옛날 사위성 동쪽에 니구류(尼拘類)라는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그늘은 5백 대의 마차를 뒤덮을 만하였다. 성 안에 범지(梵志)가 있었는데, 산술에 밝아 95종 가운데 제일이었다. 이 나무 아래에서 아난과 서로 만났다.아난에게 말하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담의 제자 중 지혜 제일인 자가 여기에 있습니까?”
“조금 알 뿐입니다.”
“적으나마 한 가지 묻고자 합니다. 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 잎사귀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아난이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고 이에 대해 대답하였다.
“이 나무의 줄기와 가지, 잎사귀는 각각 약간씩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 떠나갔다.범지가 뒤에 남아 생각하였다.
“이 사문은 그 수를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보고 답하는 것이 이러하니, 그를 시험해 보아야겠다.”
그리고 곳곳에서 나뭇잎을 60매 정도 따서 흙 속에 묻었다.아난이 걸식에서 돌아오자, 또 물었다.
“저는 아까 그 수를 잊었습니다. 다시 저에게 말해 주십시오.”
아난이 고개를 들어 그것을 보고 다시 답하여 말하였다.
“이 나뭇잎은 어찌하여 적어졌습니까?”
“어느 정도 적어졌습니까?”
“60매 정도 적어졌습니다.”그러자 범지가 두 손을 잡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미증유의 일입니다.”
또 물었다.
“그대는 나한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아나함이나 사다함입니까?”
“아닙니다.”
“수다원입니까?”
“왜 그렇게 묻습니까?”
그러자 다시 물었다.
“스승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진정왕(眞淨王)의 아들이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셨으니, 그 사람이 곧 저의 스승입니다.”그러자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스승의 지혜를 빌린 것이지, 자기가 안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러 사문이 되기를 구해, 곧 나한을 얻었다. 이것으로써 아난이 등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아난이 가섭을 나아가 받든 까닭은, 이미 그는 상좌이며, 또 존중받으며, 옛적 5백 세 동안 항상 그의 아버지였기에, 숙식(宿識)으로 존앙하여, 깊은 정을 의지한 까닭이다. 가섭이 아난에게 은근(慇懃)한 까닭은, 그는 옛적에 쌓은 두터운 인연으로 말사(末嗣)로서 은혜를 남겼으며, 덧붙여 다문(多聞)ㆍ등지(等智)ㆍ강기(彊記)로서 중생의 상수(上首)가 되고, 남겨진 전적 8만을 속집(屬集)하는 데 그보다 앞서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두 사람은 맹인과 앉은뱅이가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이 서로 도움이 된다. 만약 두 사람이 불시에 천근(千斤) 단(段:300평의 땅 넓이의 단위)의 금을 줍는다면, 올바로 서로 함께 하고자 하여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으며, 바르게 나누고자 하여 공(功)을 더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 의논하여 합세하여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큰 효용을 얻으니, 가히 지혜를 구족했다고 할 수 있다. 가섭과 아난의 그 비유는 이와 같다. 두 사람은 모두 합쳐 법보를 오랫동안 보존시킨다.그때 아난이 경을 말한 것은 무량이니, 누가 능히 그것을 구비해 한 무더기를 이루겠는가?경이 무량이란 12부경이 광대하고 몹시 많은 것이다. 적시에 말하며, 차서(次緖)를 논하지 않고, 혹은 한 가지를 말한다. 곧 열 가지를 말한다. 혹은 열 가지를 말하고 두 가지를 논한다. 혹은 세 가지를 말하고 열한 가지를 논한다. 상하(上下) 그리고 다음은 없고, 한 무더기가 될 수 없다. 혹은 어떤 설자(說者)는 “여래는 법을 말하고, 혹은 교계(敎誡)를 말하며, 혹은 단결(斷結)을 말하며, 혹은 천인 가운데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무더기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아난은 ‘1은 곧 1로부터 나오며, 2는 2로부터, 3ㆍ4ㆍ5ㆍ6 내지 10은 각각 그와 동일한 일로 하여금 서로 집착하게 한다’라고 생각한다. 혹은 어느 설자는 “이치는 그렇지 않다. 생각건대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에 비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아난이 다시 ‘경법은 넓고 크니, 마땅히 나누어 세 무더기로 하리라’라고 생각한다. 아난이 홀로 이 생각을 일으키자, 수다회천(首陀會天)은 비밀스럽게 아난에게 일러 말하기를 “올바로 마땅히 셋으로 나누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곧 천이 이른 바와 같이 분별하여 셋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계경(契經)이요, 둘째는 비니(毘尼)요, 셋째는 아비담(阿毘曇)이다.계경이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으로, 혹은 제천(諸天)ㆍ제왕(帝王) 혹은 외도ㆍ이학(異學)을 위해 각각에 따라 분별하여 각기 개해(開解)를 얻게 한 것이다. 계(契)란 실[線]의 뜻으로, 이치를 연속하여 행법을 성취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계라 한다.비니란 금률(禁律)이다. 2부 승가를 위해 악을 막고, 비리를 단속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혹은 250, 혹은 500가지 일로 법을 이끌어 삿됨을 막는 것으로, 마치 왕이 비밀리에 감춰둔 것으로 외관(外官)이 담당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내장(內藏)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계율장도 이와 같이 사미ㆍ청신사(淸信士)ㆍ청신녀(淸信女)가 듣고 볼 수 없는 까닭에 율장이라 한다.아비담이란 대법(大法)이다. 대라고 말하는 까닭은 4제(諦)의 큰 지혜는 모든 법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사견과 무명의 큰 어리석음을 끊는 까닭에 대법이라 한다. 또한 무비법(無比法)이라고도 하는데, 8지(智)ㆍ10혜(慧)ㆍ무루(無漏)의 정견은 삼계의 장애를 초월하고, 그와 동등한 것이 없는 까닭에 무비법이라고 한다. 가전연자(迦旃延子)는 여러 경을 찬집하여 그 요긴한 지혜를 엮어 부처님의 인가(印可)를 드러낸 까닭에 대법장이라고 한 것이다.아난이 또 생각하기를, ‘이 3장(藏)의 뜻은 3탈(脫)과 상응한다. 무엇이 계경인가? 묘한 지혜의 이치와 공(空)은 합치한다. 비니는 악을 제어하는 것으로 현묘한 것은 무상(無相)과 같다. 대법은 올바로 적(迹)을 보는 까닭에 무원(無願)과 같다. 따라서 3장과 3탈은 명적현회(冥迹玄會)라 한다’라고 했다.아난이 또 생각하기를, ‘계경의 대본의(大本義)는 4단으로 나뉘어 있다. 왜냐하면 문의(文義)가 혼잡하여 마땅히 사리(事理)로써 대소에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증일(增一)이요, 둘째는 중(中), 셋째는 장(長), 넷째는 잡(雜)이라 부른다. 1로써 근본을 삼고 이어서 10에 이르며, 1ㆍ2ㆍ3이 각각에 따라 증가하는 까닭에 증일이라 한다. 중(中)이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중간에 딱 알맞은 까닭에 중이라 한다. 장(長)이란 구원(久遠)의 일을 말하며, 겁이 다하도록 끊이지 않으며, 본말 근원의 일로 7불을 거쳐 성왕 7보(寶)가 있는 까닭에 장이라 한다. 잡(雜)이란 모든 경이 결(結)을 끊지만, 암송하기 어렵고 기억하기 어려워 복잡하고 잡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잊게 하는 까닭에 잡이라 한다’라고 했다.아난이 3장을 찬(撰)하여 마치고, 10경을 기록해 1게로 삼았다. 왜 그런가하면 장래 외우고 학습하는 자를 위해 그 잊어버릴 것을 걱정한 까닭이다. 이름을 보고 근본을 기억해 사유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자 한 까닭에 10경으로서 1게를 삼은 것이다.소위 잡장(雜藏)이란 한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다. 혹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혹은 제자의 말이며, 혹은 제천의 찬송이며, 혹은 숙연(宿緣)으로 3아승기의 보살이 생기는 바를 말한 것이며, 문의(文義)도 일정하지 않으며, 3장보다 많은 까닭에 잡장이라 한다.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아사세왕(阿闍世王)이 불보살의 행사를 물었다. 여래께서 자세히 그를 위해 법을 말씀하셨다. 왕이 부처님께 물었다.
“무엇을 법으로 삼습니까?”
이에 답하였다.
“법은 곧 보살장입니다.”
모든 방등(方等)의 정경(正經)은 모두 이 보살장 가운데 있는 것이다.일찍이 부처님께서 계셨을 때 이미 대사장(大士藏)이라 불렀다. 아난이 찬한 바는 곧 지금의 이 4장이다. 합하여 그것을 말하면 5장이 된다.“혹은 1법(法)이 있어 뜻 또한 깊고 수지하기 어렵고, 암송하기 어려우며, 가히 기억할 수 없다.”1법이란 곧 공법(空法)이다. 무형(無形)과 무상(無像)으로 가히 호지할 수 없다.
고요하여 소리와 음향이 없으며, 무심ㆍ무념ㆍ박연(泊然)ㆍ무상(無想)하고 최고의 제일공(第一空)이다. 그 뜻에 둘이 없고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까닭에 수지하기 어렵다고 한다. 말로 가히 대답할 수 없는 까닭에 암송하기 어렵다고 한다. 뜻으로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까닭에 기억하기 어렵다고 한다. 소위 깊은 뜻은 이와 같다.또 1법이란 갖가지 수의 근본이다. 1은 수의 시작이며, 10은 수의 끝이다. 10에서 끝나며, 또 1로부터 일어난다. 바로 천만에 이르는 것도 항상 1에서 시작한다. 이와 같이 모든 1은 가히 다함이 없다. 모든 경 가운데에 혹은 1의(義)ㆍ1법(法)ㆍ1행(行)ㆍ1사(事)가 서로 따라 그 차례를 잃지 않는다. 그 까닭에 하나하나가 서로 따라 그 차례를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2법, 즉 둘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혹은 선악을 말하며, 혹은 지관(止觀)을 말하며, 혹은 명색(名色)을 말한다. 지(止)란 허(虛)이며, 관(觀)이란 실(實)이다. 지란 삼매의 정(定)이며,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적어[泊然] 상(想)을 멸하며, 무명의 도리를 없애는 까닭에 허라 말한다. 관을 실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것으로써 분별하여 행이 있으며,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식별이 명료하여 뜻이 어지럽지 않은 까닭에 실이라 한다.3법은 셋으로 이루어진다. 셋이란 보시와 공덕, 사유이다. 이 세 가지 행은 세속의 생천법(生天法)이며, 3탈문(脫門)의 행은 열반법에 이른다. 모든 유(有)에는 3법(法)ㆍ3행(行)ㆍ3복(福)ㆍ3분법신(分法身)ㆍ3상(相)이 서로 따르며, 비유하면 이어진 구슬과 같다.4법은 4를 이루며, 5법도 그와 같다. 5법 다음에 6, 6법 다음에 7, 8법의 의미는 광대하다. 9 다음에 제10법이 이르며, 10으로부터 11에 이른다. 이와 같이 모든 수는 모두 2ㆍ3과 동일하게 사류(事類)가 서로 따른다.“아난이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는 사자좌(師子座)이다. 경에서 사자좌에 비유한 것은 사자가 짐승 가운데 왕이며, 항상 높은 곳에 머물며, 낮은 곳에 머물지 않는 까닭에 높은 자리에 비유한 것이다. 또 그 두려움 없음[無畏]을 취한다. 아난이 한량없이 널리 들어 성문(聲聞) 가운데에 홀로 두려움 없이 걷는 까닭에 무외좌(無畏座)라고 말한다.아난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이와 같다.“미륵이 선(善)이라 일컬으며, 쾌재(快哉)를 말한다.”미륵이 그와 같이 한 까닭은 아난이 보살법에 합치해 삼장의 대소를 구별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놋쇠와 금은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은근하게 부(部)를 나누기를 권청(勸請)하는 것이다.옛적에 대천성왕(大天聖王)이 네 개의 범당(梵堂)을 가지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서로 이어져 8만 4천의 왕이 모두 범당을 갖게 되었다. 오직 대천(大天) 한 사람만이 대사(大士)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소절(小節)로서 이것으로써 그것을 말한다. 대승은 말로 나타내기 어려우며, 대다수는 성문으로 나아간다. 미륵 또한 아난이 3장을 부분으로 나눈 것을 알고, 더욱이 후학이 오로지 공을 닦아 결(結)을 끊고 깨달음을 얻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대승을 선양하고 나누어 별장을 삼는 까닭에 6도의 제행을 말하니, 대사의 목요(目要)이다.보시에 두 가지가 있는데, 신시(信施)와 공포시(恐怖施)이다. 근(根)을 세워 인(忍)을 얻는 것을 곧 신시라 하며, 위력에 핍박(逼迫)되어 본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것을 공포시라 한다. 믿는 것은 곧 도(度)를 성취하는 것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곧 복을 구하는 것이다.도속(道俗)의 차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구별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두목시(頭目施)란 7주(住) 이상을 말하며, 재물시(財物施)란 6주(住) 이하를 말한다. 이로부터 물러나는 자도 생사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열반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밝히는가? 대품의 본무설(本無說) 가운데에 말하기를, “60의 보살이 나한도를 얻었는데 이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계가 금강과 같다’는 것은 대승계이다.
‘계가 배병(坏甁)과 같다’는 것은 소승계이다. 왜냐하면 금강은 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옛날, 비할 데 없이 단정한 보살비구가 걸식에 나섰는데, 길에서 단정한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보살을 보고 곧 욕심의 뜻을 일으켜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다. 도리어 스스로 이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단지 함께 앉기만 해도 나는 곧 무상(無上)의 뜻을 내리라’라고 생각했다.
보살이 여인의 마음을 알고 곧 앞에 가서 함께 앉았다. 잠시 있은 뒤에 앞으로 그를 당겼다. 비구는 잠잠히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거듭 그에게 가까이 갔지만 여전히 적연(寂然)했다.비구는 곧 그녀에게 공법(空法)을 말하였다.
“눈은 곧 어디에서 오고 가며 어느 곳에 이르는가? 부모로부터 온다고 말하려고 하는가? 아직 만나지 않았을 때는 이 눈도 없다. 후에 부서지게 될 때는 또 어느 곳에 이르는가? 눈은 소유한 것이 없으며, 5정(情) 또한 그렇다.”그러자 활연히 공을 해득해 수다원을 얻었다. 마땅히 유(有)를 말하고 다시 곧 공을 말해야 하는데 보살의 법은 마땅히 유에 들어가서 공을 말하니, 그러므로 본의를 모두 드러낸 것은 아니다.아난이 그때 이 비구와 여인이 함께 앉아 있어 비구의 위의를 범한 것을 보고 돌아와 부처님께 아뢰었다.
“조금 전에 비구와 여인이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먼저 사실을 아시고 잠잠히 계셨다. 비구는 아난이 세존께 아뢴 것을 알고 ‘생각건대 내가 바로 가지 않으면 아마도 비방한 이가 죄에 빠질 것이다’라고 하고는 바로 신변을 나타내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지만 곧바로 날아 부처님의 처소에 이르렀다.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전에 본 계율을 어긴 비구가 지금 여기로 날아온 비구이다. 너는 모름지기 욕(欲)을 범한 자가 능히 나는 것을 보았는가? 이 비구는 조금 전에 여인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때 그 여인이 마음으로 ‘이 비구가 나와 함께 앉는다면 나는 마땅히 무상의 뜻을 일으키리라’라고 생각하였다. 이 비구는 여인의 뜻을 알고 곧 함께 앉았다. 곧 그녀를 위해 공법을 말하고 눈의 공함을 분별하였고, 5정도 그와 같다고 하였다. 여인은 곧 두려워하여 바로 도적(道迹)을 얻었다. 그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김으로써 생사를 두려워하는 까닭에 소승을 얻었다. 만약 이 비구가 조금 전에 여인과 더불어 말한 행을 저지른 비구라면 도리어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다.”이일로써 알아라. 이 보살은 아직 불퇴를 성취하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을 관하는 데 아직 지극히 좋지는 못하니, 소위 금강계이다.소위 인도(忍度)란 꾸짖음을 당하거나 훼방을 당해도 묵묵히 받아들여 보복하지 않는다. 보살이 인을 행하는 데 항상 자비 등으로써 하며, 남과 나에 있어 평등하게 한다. 남과 나는 서로 같으며, 원수와 친구는 둘이 아니다.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소승의 자비는 살과 피부에 자애로우며, 대사의 자비는 골수에 투철하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만약 사람이 보살의 팔다리를 자른다면 변하여 젖이 되리니, 이것이 자비의 증거이다. 찬제(羼提) 비구는 곧 그와 같다. 비유하면 어머니가 자식을 낳으면 젖이 나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자애로운 마음을 느끼는 것으로 자연히 변해 이루어진 것이다. 대사도 이와 같다. 자비의 삼매에 들어가는 까닭에 능히 젖[乳]을 느낀다. 자비를 행하는 데 이르면 비록 활과 화살을 집더라도 중생은 도리어 나를 따른다. 자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비록 막대기를 잡지 않더라도 보고 모두 버리고 달아난다. 이것으로써 깨닫는 까닭에 대소의 차이는 스스로 오는 것이 있다.‘선악의 행을 짓는다’는 것은, 소위 정진하여 모든 선의 공덕을 짓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옛적 화만 동자(火鬘童子)가 가섭불을 비방하여 “까까머리 사문이여, 어떠한 도가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얻기 어려운 도에서 능히 도를 얻는다. 이런 까닭에 후에 6년의 근고(勤苦)를 받고 그제야 도를 얻었다. 유법(遺法) 가운데 모든 비구는 항상 이것을 논쟁했다. 더욱이 입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데 그 과보를 말했다. 6년 고행이란 행해서는 안 되는데 그 과보를 행한 것이다. 이것은 보살의 몸과 입으로 한 악행이다.‘선정’이란 적(寂)에 들어가 마음이 고요하고 욕심이 적으며 부동한 것이다.‘지혜’란 미진과 강하(江河)의 모래 수를 억 년 동안 센다 해도 가히 헤아릴 수 없음을 아는 것이다. 지혜로써 명료히 아는 것은 가히 다함이 없다.이 6도의 무극사(無極事)는 남김없이 보살장에 존재한다. 마땅히 3장과 합치하지 않는다. 아난이 대소의 인연을 구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을 서로 알지 못한다. 그 이치는 스스로 공하여, 분명히 이해하기 어렵다. 대사로서 공을 의심하는 자는 깨달음을 취하지 못하는 까닭에 호의(狐疑)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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