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진제(眞諦) 한역
이현옥 번역
1. 안락해탈품(安樂解脫品)
모든 장애를 해탈하여
원만한 덕으로 장엄하신
중생의 진실하고 좋은 벗인
일체지(一切智)의 존자께 예경드립니다.
정법은 결정코 선하니
법을 사랑하는 대왕이 되십시오.
나는 마땅히 법을 설하여
법기(法器)인 사람에게 흘러들리라.
먼저 즐거움의 원인인 법을 설하고
나중에 해탈의 법을 변별하겠습니다.
중생을 먼저 편안하게 하고
나중에 해탈을 얻겠습니다.
선도(善道)의 갖춤을 즐거움이라 이름하며
해탈을 미혹(迷惑)이 다한 것이라 합니다.
간략하게 이 두 원인을 설하면
다만 믿음과 지혜 두 가지뿐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법을 잘 지닐 수 있고
지혜를 말미암아 여실하게 요달합니다.
두 원인 가운데 지혜가 가장 수승하지만
먼저 믿음을 빌려서 행을 발해야 합니다.
어리석음ㆍ욕심ㆍ성냄ㆍ두려움으로써
법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것은 믿음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길상(吉祥)하고 즐거운 것으로서 법기(法器)라 이름합니다.
몸과 입ㆍ생각의 세 가지 업(業)을
이미 능히 순숙해서 간택하고
항상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살생ㆍ도둑질ㆍ사음
거짓말 및 이간질
욕ㆍ아첨
욕심ㆍ성냄과 삿된 견해
이들을 열 가지 악업이라 이름하며
이것의 반대말이 십선업(十善業)입니다.
술을 끊는 것과 청정한 생활과
핍박의 괴로움이 없음과 마음의 보시와
공경할 것을 마땅히 공양하는 것
간략하게 법(法)을 말하면 이와 같으니
만약 고행만을 행한다면
결코 착한 법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단지 고행만 있다면
지혜와 자비를 여의었기 때문에
남 해치는 것을 제거할 수도 없고
구제와 이익을 베풀 수도 없습니다.
보시와 지계ㆍ수행으로 밝힌
바른 법의 큰 평탄한 길이 있으나
만약 버리고 삿된 도(道)를 행하면
스스로 고통스럽게 소의 형벌을 받고
음식과 나무그늘 없는 곳에서 헤매며
삶과 죽음의 황야와 늪에서
또는 이리에게 뜯어 먹히는 처지가 되어
오랜 동안 그 속에서 살게 됩니다.
살생으로 인하여 수명이 짧아지고
핍박의 괴로움으로 많은 병을 초래하며
도둑질로 인해 재물이 궁핍해지며
다른 이의 경계를 침범하면 원망이 많아집니다.
거짓말로 비방을 만나고
이간질로 친족을 여의며
욕함으로 좋지 않은 말을 듣고
아첨으로 남의 증오와 질시를 받습니다.
탐욕으로 구하는 바를 해치며
성냄으로 두려운 과보를 받고
삿된 견해로 치우친 집착을 내며
음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됩니다.
보시하지 않아 빈궁하며
바르지 못한 생활로 속임을 당하고
공손하지 아니하면 비천해지며
질투로 인해 위덕이 없어집니다.
늘 원한을 가지면 형색(形色)이 추해지고
현명하게 듣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어지니
이러한 과보는 인간 세계에서
악취(惡趣)를 먼저 받습니다.
살생 등의 죄업은
말한 바의 과보를 받고
탐욕 등이 없어서 업에 미침은
선을 익히는 원인[善習因]이라 이름합니다.
악의 수행 및 모든 괴로움은
다 삿된 법으로부터 일어나며
모든 착한 도와 안락(安樂)은
착한 법에서 일어납니다.
항상 모든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할 것이며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써
이 두 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첫 번째 법을 말미암아
지옥 등 사취(四趣)를 능히 벗어나고
두 번째 법으로써
인(人)ㆍ천(天)ㆍ왕(王)의 부귀와 즐거움에 능히 감응(感應)합니다.
선정[定]과 범행(梵行)으로 공(空)에 머물러서
범천[梵] 등의 즐거움을 얻으니
이를 간략하게 설하여
즐거움의 원인 및 즐거움의 결과라고 이름합니다.
또한 해탈법은
미세하여 아주 보기 어렵고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범부는
들으면 공포를 일으킵니다.
아(我)가 없으므로 마땅히 생겨나는 것도 없고
현재와 미래에도 나는 없는 겁니다.
범부는 이를 두렵게 생각하여도
지혜 있는 사람은 영원히 두려움이 없습니다.
세간은 자아라는 견해[我見]에서 생겨나고
다른 일에 집착하다 속박을 받지만
부처님은 지극한 도(道)를 증득한 탓에
자비에 의거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의 존재[我有] 및 나의 것[我所]
이 둘은 실제로 모두 허망한 것이며
여실(如實)하게 이치를 보게 되면
두 집착1)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음(陰)은 아집으로부터 일어나며
아집은 의미의 허망함을 말미암으니
만약 종자가 진실하지 않다면
싹 등이 어떻게 진실하겠습니까.
만약 오음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아견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아견이 소멸함으로 해서
모든 오음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이 깨끗한 거울에 의지하여
비춰진 자신의 얼굴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그림자는 볼 수 있을 뿐
한결같이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견 역시 이처럼
오음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여실(如實)하게 검토해 보면 존재하지 않고
마치 거울에 비춰진 얼굴과 같습니다.
사람이 거울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자신의 얼굴을 못보는 것처럼
이처럼 만약 오음을 끊으면
아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뜻을 들음으로 해서
대정명(大淨明) 아난(阿難)은
바로 깨끗한 법안(法眼)을 얻어
항상 남을 위하여 이를 말하였습니다.
오음의 집착이 또한 존재하면
아견 역시 늘 존재하며
아견이 존재함으로써
업(業) 및 실유[有]가 항상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의 바퀴의 세 마디는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전변(轉變)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빙빙 도는 선화륜(旋火輪)2)처럼
삶과 죽음3)은 서로가 서로를 말미암습니다.
자기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그리고 이 둘로부터도
삼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아견의 소멸을 증득하면
다음에 업보 역시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인과와
생기(生起) 및 멸진(滅盡)을 보기 때문에
세간의 있음과 없음을
실유(實有)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법이
모든 괴로움을 다 없앤다는 것을 듣고
무지로 인하여
두려움 없는 곳에서 두려움을 냅니다.
열반처에는 두려움이 없는데
그대는 어째서 두려움을 냅니까?
말한 바대로 진실로 공한데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두려움을 내게 합니까?
해탈 가운데 아(我)와 오음(五陰)이 없으니
그대가 만약 이 법을 받아
아(我)와 모든 음(陰)을 버린다면
그대가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없음[無]도 오히려 열반이 아닌데
하물며 있음[有]이겠습니까.
있음과 없음의 집착이 깨끗이 없으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입니다.
삿된 견해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인과가 없다고 배척하는 것이니
이것은 복덕이 아닌 것을 채우는
나쁜 도의 원인으로 가장 무겁습니다.
바른 견해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른바 인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니
능히 복덕을 원만하게 해서
선도(善道)의 인(因)으로 최상입니다.
지혜를 말미암아 있음과 없음이 적멸하고
복이니 복이 아닌 것을 넘어서니,
이 때문에 선과 악의 도를 여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해탈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생겨남[生]의 원인이 있음을 보고
없음[無]의 집착을 버리며
소멸에도 원인을 공유함을 보기 때문에
있음의 집착을 버립니다.
결과보다 먼저 일어나는 원인[先生因]과 동시에 일어나는 원인[俱生因]의
진실한 뜻은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명(假名)에는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며
아울러 생겨남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음은
긴 것이 있을 때 짧은 것이 있는 것과 같고
이것이 발생함으로써 저것이 발생한다는 것은
등(燈)과 빛의 관계와 같습니다.
먼저 길었다가 나중에 짧아진다면
성품[性]이 아니기 때문에 옳지 않으며,
빛은 발생하지 않으므로
등 역시 실유(實有)가 아닙니다.
이렇게 인과의 생겨남을
무(無)에 집착하지 않고 본다면
이미 세간의 진실이
어지러운 마음을 말미암아 생겨난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소멸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에
곧 진여를 증득하는 것이고
따라서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기에
셍겨남과 소멸에 의지하지 않고 해탈합니다.
멀리 보이는 색(色)을
가까이 하면 아주 분명해지는 것처럼
아지랑이[鹿渴]가 만약 진실한 색(色)4)이면
어째서 가까이 가면 보이지 않습니까?
만약 진실한 지혜를 멀리 한다면
곧 세간의 있음[有]을 보며
진실한 법을 증득하면 보지 않으니
상(相)이 없음이 마치 아지랑이와 같습니다.
흡사 아지랑이는 물과 같지만
물도 아니고 실제 사물도 아니듯이
이처럼 오음도 인(人)5)과 같지만
인이 아니며 진실한 법도 또한 아닙니다.
아지랑이를 물로 생각하여
거기에 가서 물을 마시려 하면,
즉 없는데도 집착해서 물이라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우매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간이 마치 아지랑이와 같은 것을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집착하면
이는 곧 무명이며
어리석기 때문에 해탈할 수 없습니다.
없음에 집착하면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있음에 집착하면 선도(善道)에 태어나니
만약 능히 여실히 잘 안다면
이 둘에 의지하지 않고 해탈합니다.
있음과 없음의 집착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진실한 뜻을 간택했기 때문이고
없음의 집착에 떨어진다면
어찌 있음[有]에 떨어지리라 말 못하겠습니까?
만약 있음[有]을 깨뜨림으로 인해
의미가 없음[無]에 떨어진다면
이처럼 없음[無]을 깨뜨리므로
어찌 있음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말과 행동과 마음이 없으니
보리(菩提)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만약 그것들이 없음[無]에 떨어진 것이라고 하면
무엇으로 인하여 있음[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샹카 학파 사람[僧]과 바이쉐시카 학파 사람[世師]과
자이나교도[尼健]들도 인(人)과 음(陰)을 말하지만
있음과 없음의 초월을 말한다면
세간에 의거해 그대가 그들에게 물어보시오.
이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법으로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알아야 하나니, 아주 깊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은 감로와 같음을.
마치 깨달음[曉]은 감과 옴이 없듯이
또한 한 생각 동안도 머뭄이 없습니다.
만약 체(體)가 삼세(三世)를 초월한다면
어떻게 세간이 실유(實有)가 됩니까?
과거와 현재에 감과 옴이 없다면
현재도 실로 머물지 못하는데
세간의 발생과 머묾과 소멸
이것이 어떻게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 항상 변이(變異)가 있다면
어떤 법이 생각생각[念念] 소멸하지 않으며
만약 생각생각 소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이(變異)가 있겠습니까?
만약 생각생각 소멸한다면
일분(一分)으로 갖추고 일분으로 소멸하므로
평등하게 증명해 보지 못하기에
이 둘은 도리가 아닙니다.
만약 생각이 소멸하여 모두 다하면
어떻게 오래된 물건이 있으며
만약 견고하여 생각의 소멸이 없다면
어떻게 오래된 물건이 성립합니까?
찰나는 미래세처럼
과거와 현재세에도 존재하며
찰나는 삼제(三際)6)를 말미암기 때문에
세간의 생각[念]은 머물지 않습니다.
이 일념의 삼제(三際)는
마땅히 생각대로 삼제를 간택해야 하며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제는
자타(自他)를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일념의 분리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 분리가 없다면 무엇이 존재하겠으며
하나를 여의고 많음이 어떻게 있으며
있음[有]를 여의고 어떤 법이 없습니까?
소멸을 말미암아 대치(對治)에 미칠 때
만약 있음[有]이 없음[無]을 이룬다고 한다면
이 없음[無]이 대치에 미칠 때는
어떤 법으로 없음을 있다고 합니까?
그러므로 세간의 열반은 이런 뜻으로 인해
있음[有]을 이루지 못하며
세간의 끝[後際]이 있는가라는
다른 사람의 질문에 부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 존귀한 일체지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은 부처를 식별하니
이 매우 심오한 법을 말미암아
받을 근기가 아닌 자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해탈법은
매우 깊어 얽매임이 없고
모든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이기 때문에
의지할 바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지해 집착함이 없는 법에서
있음과 없음의 두 변(邊)을 초월하나
세간의 사람은 의지해 집착하느라고
어리석음 때문에 실수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과실로써 다른 이를 허물며
두려움으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왕이시여, 원하옵건대 그대는 흔들리지 마시고
그들로 인해 스스로 허물지 마십시오.
그대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진리를 말하였으니
전도[倒合]가 없음에 의지해서
있음과 없음의 두 집착을 여의시오.
이는 복과 복 아님을 초월하여
깊고 깊은 뜻으로서 명료한 것이니
신견(身見)이 공(空)을 두려워함이 아니니,
두 인(人)의 경계를 마땅히 말하리라.
사대(四大) 및 공(空)과 식(識)의
한 모임[一聚]으로서 모두 인(人)이 아니고,
모인 것이 흩어지면 인(人)이 아닌데
어째서 인(人)이 있다고 집착합니까?
육계(六界)가 인(人)이 아닌 것처럼
모임[聚]은 허구라서 실재(實在)가 아닙니다.
낱낱의 세계가 똑같이 그러해서
모임[聚]을 말미암기 때문에 실재가 아닙니다.
음(陰)은 아(我)와 나의 것(我所)이 아니며
음을 여의고는 아(我)가 드러나지 않고
장작과 불처럼 뒤엉켜 있지 않으니
어떻게 음(陰)에 의거해 아(我)를 이룹니까?
지계(地界)는 삼대(三大)가 아니며
지(地) 가운데 또한 삼대가 없고
삼대 가운데 역시 지가 없으니
서로 여의고는 서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사대(四大)는
각각의 자성(自性)이 성립되지 않으며
하나가 셋을 여의면 성립할 수 없고
셋이 하나를 여의어도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가 셋을, 셋은 하나를
서로 여의고는 성립할 수 없다면
각각 자신을 이룰 수 없는데
그 모습을 여의면 무엇입니까?
만약 각자 스스로를 여의고도 성립한다면
장작을 여의면 어째서 불이 없습니까?
움직임과 장애 및 서로 모이는 것
물과 바람과 땅도 또한 그렇습니다.
만약 불이 스스로 성립할 수 없다면
삼대는 어째서 각자 성립하며
삼대(三大)가 반연하여 일어난다[緣生]는 뜻과
서로 위배되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습니까?
만약 삼대가 각자 스스로 이룬다면
어째서 다시 서로 존재하며
만약 각자 스스로 이루지 못한다면
어떻게 서로 존재를 이룹니까?
만약 서로를 여의지 않고
모든 대(大)가 각기 자신을 이룬다면
섞이지 않으면 함께 함도 아니며
섞였으면 홀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모든 대(大)가 각기 성립할 수 없다면
개개의 성상(性相)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각자 이루어서 치우치게 많지 않아서
그 모습[相]을 가명(假名)이라고 말합니다.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뜻을 간택하는 것도 마치 대(大)와 같고
눈과 색(色)과 식(識)ㆍ무명(無明)과
업(業)과 발생(發生)을 간택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작자(作者)ㆍ업(業) 및 일[事],
숫자ㆍ합ㆍ인과ㆍ세간
짧음과 길음 및 이름과 상념,
상념 아닌 것을 간택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등과
길음과 짧음 및 작음과 큼,
착함과 나쁨을 분별지[識智]라고 하며
이는 지혜 가운데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마치 식처(識處)에 형태가 없고
가없이 일체에 두루하듯이
여기서 지(地) 등의 대(大)는
모두 다 멸하여 없어집니다.
이 무상(無相)의 지혜 가운데
짧음과 길음, 착함과 나쁨의 업,
명색(名色) 및 모든 음(陰)이
이와 같이 남김없이 소멸합니다.
이들은 식(識) 가운데
무명으로 인해 먼저 존재하며
식에서 만약 지혜가 일어나면
이들은 나중에 다 없어집니다.
이들 세간의 법들은
식(識)의 불을 사르는 장작이니,
실량(實量)의 불빛으로 인해
세간의 식(識)은 장작을 모두 태웁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고
나중에는 진여(眞如)마저도 간택하는데,
있음[有]을 찾아도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없음[無]을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음을 말미암기에
공(空)하며 단지 이름뿐인데
대(大)를 여의고 어찌 색(色)을 이루겠습니까?
그러므로 색 역시 이름뿐입니다.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사대(四大)와 같이 생각해야 하니,
사대는 자아[我]처럼 허망하고
육계(六界)는 인법(人法)이 아닙니다.
2. 잡품(雜品)
한 겹 두 겹 파초의 껍질을 벗기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듯이
사람을 육계(六界)로 분석하면
텅 빈 것이 그와 같습니다.
이 까닭으로 부처님은 바로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으니
단지 육계를 이름하여 법이라고 할 뿐
판단해 보면 진실로 무아(無我)입니다.
아(我)와 무아(無我) 두 뜻을
여실(如實)하게 검토하니 얻을 것이 없으며
그 때문에 여래께서는
아(我)와 무아(無我)의 두 극단을 부정하셨습니다.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말하는 것은
실답지 않은 허망한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둘은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둘은 여실(如實)하게 없습니다.
여실하게 세간을 살피면
실재[實]도 초월하고 또한 허망도 초월하지만,
세간은 실재(實在)에 의지하고 있기에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에 떨어집니다.
만약 법이 두루 여여하지 않으면
어떻게 부처님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세계의 유한[有邊] 및 무한[無邊]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함[有二]과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음[無二]을.
과거의 부처님은 무량(無量)하며
현재와 미래에도 그 숫자를 초월하니
숫자를 넘어선 중생의 치우침[邊]은
삼세(三世)에 부처님을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세간은 늘어나는 원인이 없으니
이런 즈음[際]은 세간을 잡아서 드러나고
세간은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것인데
어찌 부처님께서 세계의 끝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법이 이와 같이 심오하기 때문에
범부에게 비밀스런 뜻을 말하지 않았으며
세간은 환화(幻化)와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부처님의 감로의 가르침입니다.
비유하면 허깨비 모습처럼
발생과 소멸은 오히려 볼 수 있으나
환화의 모습과 소멸의
진실한 뜻을 살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간은 환화와 같으며
발생과 소멸도 그렇게 볼 수 있으며
세간과 생멸은
진실한 뜻을 잡으면 모두 허망합니다.
허깨비의 상(像)은 좇아 온 바가 없고
가는 곳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의 마음을 미혹해서
실유(實有)를 말미암아 머물지 않네.
세간의 체(體)는 삼세를 초월하는데
만약 그러하다면 세간이 어찌 실재하며
누가 있음과 없음을 말하겠습니까.
있음과 없음은 실다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사구(四句)에 의하여
세간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있음과 없음을 말미암은 것은 모두 허망하나
이 허망함은 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부정한 모습[不淨相]이며
지혜의 경계를 거칠게 증득하기에
항상 자주 자주 보이는 것도
오히려 마음에 들어와 머물지 못합니다.
하물며 정법(正法)은 미세하고
아주 깊어 의지하는 토대[依底]가 없어서
산란한 마음으로는 증득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쉽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처님은 처음 성도(成道)하셨을 때
설법을 포기하고 열반하시려 하셨으니
이 정법(正法)이 너무나 깊어서
이해하기 어려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을 올바로 요달하지 못하면
총명하지 못한 사람을 해치게 되며
이에 집착하여 삿된 견해에 떨어지는 것은
더러운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보다 못합니다.
사람들이 법(法)의 식별이 분명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높이고 법을 경시하기 때문에
비방을 일으키고 자신을 훼손시켜
머리를 밑으로 하며 지옥에 떨어집니다.
비유하자면 진귀한 음식처럼
지나치게 복용하면 위해(危害)를 당하고
만약 이치대로 음식을 복용하면
장수와 힘과 강인함과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약 치우치게 정법을 이해하면
괴로움을 당하는 것 역시 그와 같으며
이치대로 잘 이해하면
즐거움과 보리(菩提)에 감응(感應)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정법에 대해
비방과 삿된 견해를 버리며
바른 지혜 가운데 작용[用]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뜻대로 일을 이룹니다.
이 법을 요달하지 못함으로 해서
사람들은 길이 아견(我見)을 일으키고
이로 인하여 세 가지 업을 지으며
다음에 선과 악의 도(道)가 일어납니다.
나아가 아직 법을 증득하지 못하면
아견(我見)을 잘 없애서 멸하지 못하므로
항상 공경하며 지계ㆍ보시ㆍ인욕 등에 대해
정근(正勤)을 일으켜야 합니다.
일을 함에 있어 법을 우선으로 삼고
아울러 법을 중간으로 하고 나중으로 하면
이른바 허망하지 않은 진리는
현재와 미래에 그대는 빠지지 않습니다.
법으로 인하여 좋은 이름을 나타내고
죽음에 임하더라도 기꺼이 두려움이 없으며
내생(來生)에 부귀와 즐거움을 받을 것이니
그러므로 항상 법을 행해야 합니다.
오직 법만이 바른 다스림이며
법으로 인하여 천하가 사랑하게 되고
만약 군주가 백성에 감응(感應)하여 사랑한다면
현재와 미래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법이 아닌 것으로 다스리고 교화하면
주인이 신하로부터 염오(厭惡)를 받으며
세간의 증오로 인하여
현재나 미래에 환희가 없습니다.
왕의 법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바로 대난악도(大難惡道)이니,
나쁜 지혜로 삿된 명(命)을 논하는 것을
어찌 바르다고 설하겠습니까?
만약 사람이 오로지 다른 이를 속인다면
어찌 바른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로 인하여 수많은 생명 가운데
항상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만약 원망으로 근심이 생겼다면
과실을 버리고 그 덕을 취하십시오.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채우면
바로 원망과 근심과 번뇌가 있게 됩니다.
보시와 자애스러운 말,
유익한 행동[利行]과 협동에 근거해
원하옵건대 그대는 세간을 섭수하고
이로 인하여 정법을 널리 펴시오.
왕이여, 마치 한 마디 진실한 말이
백성들에게 굳은 믿음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처럼 고귀한 분의 헛된 말은
다른 이에게 편안한 믿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진실한 생각을 일으켜 어긋남이 없다면
순조롭게 흐르듯 능히 남을 이롭게 하니
이를 진실한 말[實語]이라 이름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거짓말[妄語]이라고 합니다.
재물 하나를 시여[捨]함이 만약 밝다면
왕의 과실을 잘 은폐시킬 수는 있지만
그처럼 군주가 재물에 인색하면
왕의 뭇 덕을 해칠 것입니다.
만약 왕이 여러 악에 대해 적정(寂靜)하다면
공덕이 깊어 사람들의 사랑이 두터울 것이고
이로 인하여 가르침을 밝히는 왕이 될 것이니,
그러므로 일이 마땅히 적정해야 합니다.
지혜로 인해 왕은 잘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 요달하여 다른 이를 믿지 않으므로
영원히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진리와 시여와 적정과 지혜에 의하여
왕은 바로 네 가지 착함[四善]을 갖추게 되니
이 네 가지 덕의 정법(正法)은
인천(人天)이 찬탄하는 것입니다.
능히 조복해서 청정을 설하며
지혜와 자비와 무구(無垢)로 인하여
항상 지혜 있는 사람과 함께 모인다면
왕의 법과 지혜는 생장(生長)합니다.
좋은 말하는 사람을 얻기 어렵지만
제대로 듣고 말하는 사람도 얻기 어려우며
세 번째로 이 훌륭한 가르침을
신속히 행하는 사람이 가장 수승합니다.
만약 애착할 것이 아님을
이미 알았다면 빨리 수행해야 하니,
마치 약맛이 비록 쓸지라도
차도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장수와 무병과 왕위는
항상 무상(無常)하다고 생각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싫고 두려운 생각을 일으키며
나중에는 전심전력으로 법을 행해야 합니다.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보면
죽음은 악견의 괴로움으로부터 오니
지혜 있는 사람은 현재 즐겁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한 생각도 두려움 없음을 보더라도
나중에 두렵게 보거나
만약 한 생각이라도 마음이 안주하면
어찌 나중에 두렵지 않겠습니까?
술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일에 손해를 입고 체력이 감소하며
또한 어리석음 때문에 잘못된 일을 행하게 되니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술을 끊어야 합니다.
도박 등의 놀이는
탐냄과 성냄과 근심과 아첨을 일으키며
속임과 거짓말과 욕의 원인이므로
항상 멀리 여의어야 합니다.
음행을 즐기는 과실(過失)은
여인의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나
여인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면
실제 한 터럭의 깨끗함도 없습니다.
여인의 입은 타액의 용기이며
치아와 혀의 때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코의 역한 냄새는 콧물에서 비롯된 것이며
눈은 눈물 따위의 의지처입니다.
배는 똥과 오줌과 창자의 그릇이며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뼈와 살의 모임입니다.
어리석은 이는 싫어해야 할 것에 미혹되기에
여인의 몸을 탐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성기[根門]는 가장 냄새가 역하며
이는 몸을 싫어하게 하는 원인이니,
여기에 만약 애착을 일으키면
어떤 연(緣)으로 여읠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면 똥오줌의 용기(容器)를
돼지가 좋아하여 그 속에서 놀듯이
몸의 청정치 못한 문(門)에서
많은 욕심으로 유희하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이 문을 세우는 까닭은
몸의 더러움을 버리기 위해서이니,
어리석은 이는 삿된 견해에 애착하며
자신의 좋은 이로움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대는 스스로 보아야 합니다.
똥오줌 등의 깨끗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 부분들의 모임을 몸이라 이름하는데,
그대는 어째서 애착을 일으키는 겁니까?
혈액과 정액이 생장의 씨[生種]가 되며
흘러들어가 생장(生長)합니다.
만약 몸의 깨끗하지 않음을 안다면
무슨 의미로 괴로움에 애착을 일으킵니까?
더러움의 덩어리를 증오해야 하면
역겨운 습기가 뱃속에 들어 있으니
만약 처(處)7)에 누우면
여인의 몸을 애착해 집착할 것입니다.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늙었거나 어린 소녀거나
여인의 몸은 다 깨끗하지 않은데
그대는 어째서 처(處)에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설령 똥 덩어리가 좋은 색(色)이고
부드럽고 매끄러워 자태가 반듯하여도
애착을 일으켜서는 안 되듯이
여인의 몸에 애착을 갖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속에서 냄새가 나서 매우 깨끗하지 못하고
겉의 피부가 장기를 덮고 있으니,
이 시신의 종성(種性)을
어찌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피부의 깨끗하지 않음은 옷과 같아서
잠시 풀어헤쳐서 세탁할 수 없는데
어떻게 때 투성이의 피부를
일시에 깨끗이 닦을 수 있겠습니까?
꽃병에 더러운 똥을 가득 채우고
겉을 장식하여도 그대는 싫듯이
이 몸은 더러움의 씨[種]로 가득 차 있으니
어찌 그대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대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싫어한다면
어찌 여인의 몸을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향과 꽃장식[華鬘]과 음식은
본래 깨끗하나 잘 오염됩니다.
그대여 자신이나 남이 똑같이
더러운 똥을 싫어하듯이
자기와 남의 깨끗하지 않은 몸을
어찌 그대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여인의 몸이 깨끗하지 못하듯이
자신의 더러움 역시 그러하며
이 까닭으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안팎에서 서로 칭송받습니다.
아홉 구멍[九門]에서 깨끗하지 못한 것이 흐르니
스스로 증득하여 스스로 씻어야 하며
만약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하면
애욕의 논란을 짓게 될 것입니다.
아주 깨끗하지 못한 몸에 대해
드물 정도로 아주 무지(無知)하고
부끄러움이 없고 다른 이를 업신여기면
어떤 방법으로 그대를 이롭게 하겠습니까.
뭇 중생들이 이로 인하여
그 마음이 무명(無明)에 덮여서
티끌의 욕심 때문에 원한을 짓는 것은
개가 똥을 갖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가려운 곳을 긁으면 시원하지만
가려운 곳이 없다면 가장 편안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욕망이 있어도 즐겁지만
욕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즐겁습니다.
만약 그대가 이 뜻을 생각한다면
욕망의 여읨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생각으로 인해 욕망을 경시하고자 하므로
음행을 즐기는 실수는 하지 않습니다.
사냥으로 인해 단명[短壽]의 과보를 감응해서
두려움과 괴로움의 무거운 번뇌에 쫓기며
미래에 반드시 이것을 받을 것이니
그러므로 굳건히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그에게 극도의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비유하자면 더러운 똥이 몸을 오염시키고
독이 나쁜 뱀의 몸에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약 피안에 이르면
중생은 안락을 얻습니다.
비유하자면 여름날 큰 구름을 보고
농부[田夫]가 비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쁜 법을 버리고
결정코 마음을 닦고 착함을 행하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결과를
나와 남 모두 얻을 것입니다.
이 보리의 근본은
수미산[山王]처럼 견고한 마음과
시방의 자비를 인하는 것과
둘에 의지함 없는 지혜입니다.
대왕이여, 진리를 잘 경청하시오.
이 원인을 내가 이제 말하겠습니다.
32상(相)에 감응한다면
그대의 몸을 능히 장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탑[支提]과 성스럽고 존귀한 사람을
공양하여 늘 가까이 모시면
손과 발에 보상륜(寶相輪) 있는
전륜왕(轉輪王)이 장차 될 것입니다.
손발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몸이 크고 일곱 곳에 융기[高]가 생겨나고
맛있는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풍족하게 보시함으로써
몸은 원만하고 반듯하며
손가락과 발과 발뒤꿈치가 둥글고 깁니다.
사형수를 자비로써 구제하면
그대는 장차 장수의 과보를 받습니다.
대왕이여, 굳건히 법을 지켜
청정한 곳에 영원히 머무소서.
이로 인해 다리가 평화로운 곳에 안주하여
장차 보살이 될 것입니다.
보시와 자애스러운 말과
유익한 행동과 협동을 행하면
이로 말미암아 지강밀(指綱密)8)이 되며
손발이 80문(文)입니다.
발뒤꿈치[脚趺]가 높아 사랑스럽고
고수머리[族毛]의 모양이 위로 향하는 것은
오래도록 본디 받아 지닌 법을
버리거나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경과 보시와 수용과
명처(明處)와 솜씨[工巧]로 인해
사슴왕의 살점[膞]은
총명한 큰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어떤 물건을 요구하면
나는 빨리 은혜를 베풉니다.
이로 인해 손바닥이 크고
세간 교화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가깝고 사랑하는 자와 만약 이별했다면
보살은 화합해 모이게 하나니,
이에 음장상(陰藏相)9)에 감응하여
항상 부끄러움(羞)의 옷을 입습니다.
항상 건물[樓殿]과 좌구[具]를 보시할 때
섬세하고 유연하고 사랑스런 색(色)으로 하니
이 때문에 하늘[天]의 색신(色身)의
매끄럽고 빛나고 미묘함에 감응합니다.
무상(無上)의 지킴[護]을 베풀고
이치대로 존귀한 장로를 따르면
한 구멍 한 터럭[一孔一毛]에
백호(白毫)로 장엄된 얼굴의 과보를 받습니다.
항상 착하고 자애스러운 말을 하고
또한 바른 가르침에 잘 따르면
상반신은 마치 사자처럼
목이 원만하여 조가비에 비유할 만합니다.
병든 이를 돌봐주고 약을 주며
또한 다른 사람을 기르고 보호[養護]하면
이로 인해 겨드랑이 밑이 원만해지고
천 맥(脈)과 별도로 백 가지 맛을 얻습니다.
자기와 남의 법사(法事)에 대해
항상 능히 으뜸이 되면
정수리[頂骨]는 울니사(鬱尼沙)10)가
뺨[橫竪頰]은 닉구(匿瞿)가 됩니다.
오랫동안 솜씨 있게 말하고
진실하고 예쁘며 부드럽고 좋은 말을 함으로써
여덟 상호와 범천의 음성과
넓은 혀를 얻습니다.
이미 일의 실리(實利)을 알고
자주 남을 위해 말하면
사자와 같은 상호를 얻어
얼굴은 바야흐로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업신여기지 않으며
바른 이치를 수순해 행하면
비유하자면 마치 진주처럼
치아는 하얗고 가지런해집니다.
진실하여 이간질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런 말을 자주 익힘으로 말미암아
40개의 치아를 갖추게 되니
가지런하고 윤이 나며 견고하고 촘촘하여 깨끗합니다.
중생을 봄이 부드러워서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에
눈동자는 푸르고 부드러우며 또렷하고
눈꺼풀은 소왕[牛王]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 말하노니
위대한 사람의 상호 및 원인이
전륜왕과 보살의
아름다운 장식임을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따르는 상(相)은 80개로서
자비로부터 흘러 발생하니
대왕이여, 많은 설명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전륜성왕들이 다
이 상호를 갖추었지만
청정함과 지혜로움과 사랑스러움은
결코 여래에 미치지 못합니다.
보살의 착한 마음 가운데
일념(一念) 속의 일분(一分)으로부터
전륜성왕의 상호(相好)의 원인이 생기지만
도저히 그와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만억 겁 동안
착한 근기[善根]를 닦아 생장(生長)하여도
부처님 한 터럭의 모습에는
이 원인도 감응하지 않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전륜왕의
모습 가운데 일부는 비슷하나
비유하자면 반딧불과 해처럼
빛이 약간 비슷할 뿐입니다.
3. 보리자량품(菩提資粮品)
모든 부처님의 위대한 상호는
불가사의한 복덕에서 일어나니
내 이제 대승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거해
그대에게 말하겠습니다.
모든 연각의 복(福)과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복
시방 세계의 복은
세간처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 복에 다시 열 배 한 것은
부처님의 한 터럭의 상호에 감응(感應)하니,
9만 9천의 터럭에서
낱낱의 복덕이 다 그러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복덕이
부처님의 모든 터럭에 감응하고
다시 백 배 늘어나면
바로 부처님의 한 상호[好]에 감응합니다.
이와 같이 무수히 많은
낱낱의 상호(相好)를 이루고
마침내 80상호를 채움에 따라
하나의 큰 상호[大相]를 장엄합니다.
이와 같은 복덕이 모여
80상호에 감응하고
다시 100배 증가한 것을 합하여
부처님의 한 큰 상호[大相]에 감응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복덕은
30상호에 잘 감응하고
다시 100배 증가하면
마치 보름달처럼 백호에 감응합니다.
능히 백호의 복덕에 잘 감응한 것에
다시 1000배 증가하면
이 복은 보기 어려운
정수리 위의 울니사(鬱尼沙)에 감응합니다.
이와 같이 무량의 복덕을
방편으로 헤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시방에 대해
10배의 세간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부처님 색신의 원인은
오히려 세간처럼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부처님 법신의 원인에
변제(邊際)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간의 원인이 비록 작더라도
만약 결과가 크면 헤아리기 어렵고
부처님의 원인이 이미 무량한데
과보를 헤아리는 것을 어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부처님에게 있는 색신은
복을 행하는 것에서 일어나니
대왕이여, 부처님의 법신은
지혜의 행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복덕과 지혜의 행은
보리의 정인(正因)이니,
그대는 항상
보리의 복덕과 지혜를 행해야 합니다.
보리의 복덕을 이루는 가운데
그대는 침체되거나 근심이 없을 것이니
이법[理] 및 성스런 가르침[阿含]은
능히 마음을 안신(安信)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시방에 끝이 없는
공(空) 및 지(地)ㆍ수(水)ㆍ화(火)와 같으니,
괴로움이 있는 중생들
그들의 가없음 역시 그러합니다.
이 가없는 중생들은
보살이 대비에 의거해서
괴로움에서 구제하여
그들의 반열반(般涅槃)을 원합니다.
이 굳은 마음을 일으켜서
다니고 머물고 눕고 지각함으로부터
때론 조금 방일하여도
무량한 복덕이 항상 흐릅니다.
복덕의 양은 중생과 같아서
항상 짬 없이 흐르고
원인과 결과가 이미 서로 부합했으니
따라서 보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절과 중생
보리와 복덕
이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인해
보살의 견고한 마음이 행합니다.
보리가 비록 무량하더라도
앞의 사무량심으로 인하며
복덕과 지혜의 두 행을 닦으면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복덕과 지혜의 두 행은
이처럼 끝이 없으니
그러므로 보살의 몸과 마음의 괴로움은
빨리 소멸됩니다.
악도(惡道)ㆍ기갈 등의
몸의 괴로움은 악업으로부터 일어나니
보살은 영원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욕심ㆍ성냄ㆍ두려움 등
마음의 괴로움은 어리석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둘 없는 지혜에 의거함으로 인해
보살은 마음의 괴로움을 여윕니다.
고통 받는 시간이 짧은 경우에도
참기 어려운데 하물며 많다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고통 없는 시간이 길이 영원해서
즐거움이 있다면 어찌 어렵겠습니까.
몸의 괴로움이 영원히 있지 않고
마음의 괴로움이 있다고 임시로 설하면
세간의 두 고통을 측은해 하기 때문에
항상 삶과 죽음에 머뭅니다.
그래서 보리는 긴 시간을 요구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을 침체시키지 않고
악을 소멸하고 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짬 없이[無間] 수행합니다.
원하옵건대 탐냄ㆍ성냄ㆍ무명을
그대는 알아채서 버리거나 여의고
탐냄이 없는 것[無貪] 등의 뭇 선을
알아서 공경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탐냄으로 해서 아귀(餓鬼)의 도(道)에 태어나고
성냄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지며
어리석음으로 해서 축생에 들어가며
이것이 뒤바뀌면 인천(人天)의 과보를 받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닦는
이 법은 바로 즐거움의 원인이니,
만약 이 해탈의 법이라면
지혜를 말미암아 두 집착을 버립니다.
불상과 탑과
전당(殿堂)과 사묘(寺廟)에는
가장 수승한 많은 공양의 도구로써
그대는 마땅히 공경을 하여야 합니다.
보련화(寶蓮花) 위에 앉아서
좋은 색과 미묘함으로 그림을 그리고
모든 금은보화로써
그대는 불상을 조성해야 합니다.
정법과 성스런 무리[聖衆:출가자들]를
신명으로써 지키는 일을 해야 하고
황금 보배 그물과 산개(繖蓋; 일산)를
봉헌하여 탑을 덮어야 합니다.
금은의 많은 보화
산호와 유리의 구슬
제석천왕의 청(靑)과 대청(大靑)과
금강(金剛)으로써 탑에 공양합니다.
정법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네 가지 물건으로써 공양하고
육화경(六和敬)11) 등의 법을
항상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며
존귀한 이를 공경하고 경청하며
부지런히 섬기고 모시며 지킬 것이며
보살에게는 반드시
죽은 후에도 공양을 행해야 합니다.
천외도(天外道)의 무리에게
가까이 섬기는 예를 해서는 안 되며
무지와 삿된 믿음으로 인해
악지식(惡知識)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 및 논(論)을
베껴 쓰고 독송하는 보시를 하며
또한 종이와 붓과 묵을 보시해야 하니
그대는 이 복덕을 닦아야 합니다.
국가에 학당을 세워
선생을 고용하고 학사를 공양해야 하며
토대가 되는 업을 영원히 흥건(興建)하면
그대의 행은 오랫동안 지혜로울 것입니다.
의술과 역수(曆數)를 이해하고
모두 전주(田疇; 전답)를 세워야 하며
국가가 병든 노인과 고아의 병과 고통에 은혜를 베풀어
구제하여 이롭게 해야 합니다.
모든 도량에 가람과 장원과
제방과 호수와 정자를 세우고
생활 침구와
풀자리[草蓐]와 음식과 땔감을 주어야 합니다.
작은 나라와 큰 나라의 국토에
절과 정관(亭館)을 세워야 하며
같이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한 곳에
우물을 짓고 음식물을 베풀어야 합니다.
병들어 아픈 자와 의지할 데 없는 자와 가난한 자
신분이 천한 자와 두려움에 떠는 자 등은
자비에 의하여 섭수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안심시켜야 합니다.
그때그때 새 음식과
과일 채소 및 햇곡식을
대중 및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보시하기 이전에 먼저 써서는 안 됩니다.
신발과 일산과 병과 대패와 족집게와
침과 실과 부채 등
전제(筌蹄)12)와 침식(寢息) 도구를
절과 정관(亭館)에 보시해야 합니다.
세 가지 과일13)과 세 가지 향신료14)와
우유와 꿀과 안약과 해독제로
항상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살피고
주문(呪文) 및 약 처방을 써야 합니다.
머리와 몸에 바르는 약 기름[藥油]과
조반(操盤:물을 정수하는 돌)과 등불과 초과(麨果:보리 미숫가루)와
물그릇과 도끼 등을
반드시 정관(亭館)에 갖추어야 합니다.
쌀과 곡식과 삼베와 음식과
사탕과 기름 등에 해당하는 것을
항상 그늘진 시원한 곳에 두고
깨끗한 물을 그릇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개미와 쥐구멍의 입구에
음식과 곡식과 사탕 등을
원하건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시켜
매일 흩뿌려 주어야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식전이나 식후에
항상 아귀와
개와 쥐와 새와 개미 등에게
음식을 항상 보시해야 합니다.
재난과 악성 유행병과 기아가 있을 때
수재와 가뭄 및 도적의 재난과
나라가 패망했을 때는 반드시 제도하여
항상 돌봐주어야 합니다.
농부가 농업을 망치게 되면
양식과 종자와 기구를 주고
수시로 세금을 탕감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경미하게 해야 합니다.
물건을 보시함으로써 가난한 채무자를 구제하고
채무를 그쳐서 오래지 않아 채무가 가벼워지게 하고
직접 막아서 휴언(休偃; 휴식)을 허락하고
때맞춰 귀한 손님을 접대합니다.
국경선 안팎의 도둑은
방편으로 진압하여 그치게 하며
때때로 상려(商侶; 行商)를 파견하여
물가를 안정되게 조절합니다.
팔좌(八座)15) 등으로 일을 판결하고
스스로 이치대로 관찰할 것이며
일은 능히 만백성에 이롭게 하며
항상 공경하고 수행하십시오.
무엇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인가를
그대가 항상 공경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남을 이롭게 하는 것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를
그대는 빨리 생각해야 합니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등과
약초 및 야생나무가
이와 같이 잠시 있더라도
남의 길림 없는 채찍[策]을 받습니다.
일곱 걸음을 걷는 짧은 순간에 마음을 일으켜
모든 재물을 버리면
보살은 복덕을 이루게 되니
마치 허공처럼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소녀를 아름답게 꾸며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다라니를 얻어서
일체법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스런 용모를 갖추고 장엄하여
더불어 모든 것을 갖춘
전생에 8만 소녀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보시하였습니다.
빛나고 밝은 다양한 색의
의복과 장식기구와
꽃과 향 등을 자비에 의해서
요구하는 자에게 보시해야 합니다.
사람이 이 연(緣)을 여의고도
법에 대하여 안락한 행이 없다면
마땅히 그것을 보시해 주어야 하니
이를 지나친 후에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독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면
독 또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 허락됩니다.
감로(甘露)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다면
감로를 보시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치 독사가 사람의 손가락을 물었을 때
부처님도 즉시 손가락을 잘랐듯이
부처님은 다른 이에게 이익이 된다면
괴롭더라도 역시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실로 조심스레 정법을
잘 설하는 분을 보호하고
공경하면서 법을 들어야 하고
혹은 법으로써 다른 사람에 베풀어야 합니다.
세간의 찬탄을 좋아하지 말며
항상 출세간의 법을 즐거워하고
자체의 공덕을 세우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며
진실한 뜻을 생각하고 닦으며
스승에 대해 보답하고 은혜에 보시하며
공경을 행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외도의 삿된 논(論)을 읽지 말아야 하니
다투고 업신여기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자신의 덕은 찬탄해서는 안 되고
원수의 덕을 찬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스런 일을 폭로하거나
나쁜 마음으로 이간질하지 말 것이며
자신이 남에게 잘못을 했으면
이치대로 관찰하여 뉘우침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이 잘못으로 인해서
지혜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꾸짖는다면
스스로 그 잘못을 반드시 여의어서
능히 다른 사람을 구제해야 합니다.
남이 자신을 욕보이더라도 성내지 말며
즉시 전생의 악업을 관찰해서
남에게 악으로 보복하지 말아야 하니
나중에 괴로움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 것이며
오로지 자신 혼자만 괴로움을 받고
즐거움을 받는 것은 중생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큰 부귀를 얻더라도
스스로 거만함을 지어서는 안 되고
아귀처럼 왜곡을 당해도
천한 자기연민의 행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왕위를 잃거나
혹은 죽더라도 진실한 말만을 사용하고
또한 항상 이 말을 할 때
참된 이익이 없다면 침묵하시오.
말한 대로 이와 같이 행하고
견고하게 선을 행하길 바라니,
이로 인하여 훌륭한 두루해서
자재하게 뛰어난 양[勝量]을 이룹니다.
응당 숙고해서 간택해야 하고
나중에는 이치에 의거해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어 일을 하지 말며
반드시 스스로 진실한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치에 의거해 선을 행하면
훌륭한 명성이 두루 시방에 미쳐
왕후(王侯)가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왕의 부귀와 즐거움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죽음의 연(緣)은 백한 가지 종류나 되나
수명의 원인은 많지 않습니다.
이 원인은 어떤 경우 죽음의 연이 되니
항상 선을 수행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항상 선을 행하면
그 얻어지는 바가 안락하고
만약 자기와 남을 평등하게 대하면
이 착한 즐거움이 원만히 채워집니다.
법에 의지하는 것을 본성으로 삼는 사람은
깨달음에 의지하므로 항상 안락하며
꿈 가운데 착한 일을 보는 것은
내면에 과실과 악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부모님을 공양하고
가문의 존귀한 분을 공경하여 봉사하고
착한 사람을 공경하는데 재산을 사용하면
인욕으로써 크게 제도할 것입니다.
부드러운 말씨와 이간질하지 않음과
진실한 말은 똑같이 즐거움에 이르게 합니다.
이 아홉 가지는 천제(天帝)의 원인이니
목숨이 다하도록 마땅히 수행해야 합니다.
전생에 아홉 가지 법을 행함으로서
천주(天主)의 제위(帝位)에 오르는 과보를 받아
때때로 법당에 처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늘 이것을 말합니다.
하루 세 번 좋은 음식
삼백 그릇을 보시하는 복덕은
자비를 찰나 행하는 복덕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천인(天人) 등이 사랑하고 보호하며
매일 희락(喜樂)을 받고
원한의 불길과 독한 매를 면하니
이것은 자비행이 나타난 결과입니다.
애쓰지 않고도 재물을 얻으며
나중에 색계(色界)에 태어나니
사람이 해탈을 아직 못하였어도
자비의 열 가지 공덕을 얻습니다.
모든 중생을 교화해서
견고한 보리심을 발하게 한다면
보살의 공덕은 수미산과 같고
보리심은 공고합니다.
믿음으로 인해 여덟 고난[八難]을 여의고
계(戒)로 인하여 선도(善道)에 태어나며
자주 진여공(眞如空)을 수행하면
착함을 얻어 방일(放逸)이 없습니다.
아첨이 없어 염근(念根)을 얻고
항상 사유하여 혜근(慧根)을 얻으며
공경으로 의리(義理)를 얻고
법을 수호하여 숙명(宿命)에 감응합니다.
보시하고 법을 청문(聽聞)하며
혹은 다른 사람의 청문을 방해하지 않으니
빨리 애호(愛好)하는 바를 얻어서
부처님과 서로 만날 것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일을 이루고
간사함이 없으면 재물이 늘어나며
거만함을 여의면 상품(上品)에 올라
법인(法忍)으로 총지(總持:다라니)를 얻습니다.
오실(五實)16)의 보시를 행하고
또한 두려움 없이 은혜를 베풂으로써
어떤 욕설로도 능히 욕보일 수 없으니
이로 인해 대승(大勝)의 힘을 감응합니다.
탑에 등(燈)을 행렬해서
어둠 가운데 불꽃을 지키고
기름을 계속해서 보시하면
그 때문에 청정한 천안[淨天眼]을 얻습니다.
탑에 공양할 때
바로 장고와 음악과
법라[螺角] 등의 미묘한 소리[妙音]을 설치하면
그 때문에 청정한 천이[淨天耳]를 얻습니다.
다른 사람의 과실에 침묵하며
인덕(人德)의 단점을 얘기하지 않고
수순(隨順)하여 그의 뜻[意]을 지키면
그 때문에 타심지(他心智)17)를 얻습니다.
신발이나 배를 보시하며
허약한 사람을 운송하고
삼가 공경하여 존귀한 어른을 우러러 보면
그 때문에 여의통(如意通)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법사(法事)와
정법(正法)의 구의(句義)를 기억시키고
혹은 깨끗한 마음으로 법을 보시하면
숙명지(宿命智)를 감응합니다.
모든 법에 자성이 없다는
진실한 뜻을 알면
그 때문에 여섯 번째 신통을 얻으며
이는 가장 수승한 누진통(漏盡通)입니다.
평등한 자비에 상응하며
여실지(如實智)를 수행하면
이론 인해 스스로 성불해서
항상 중생을 해탈시킵니다.
여러 가지 청정한 염원을 말미암아
불국토가 청정하게 되고
탑에 뭇 보물을 헌상하면
가없는 빛을 방출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업과 결과가
이미 뜻에 상응함을 알고
이타(利他)를 수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자리행(自利行)입니다.
4. 정교왕품(正敎王品)
왕이 법이 아닌 것을 행하거나
혹은 도리가 아닌 것을 행하여도
왕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래도 찬탄하니
그러므로 좋고 나쁜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또한 세간의 사람도
착함[善]을 좋아하지 않아 가르치기 어려운데
하물며 큰 국가의 왕이
착한 사람의 말을 잘 듣겠습니까.
나는 지금 그대에게 연민을 느끼며
또한 모든 세간을 불쌍히 여겨서
그대가 좋아하지 않아도
진실로 이로운 것을 잘 가르치겠습니다.
진실로 순조로워 뜻에 이로움이 있고
시기에 의거해 자비를 말미암으라고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니
나도 그대를 위하여 말하겠습니다.
만약 진실한 말을 경청하려면
마땅히 성냄에 머무르지 않고
취할만한 것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니
마치 목욕할 때 깨끗한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이제 현재와 미래에 이익이 되는
좋은 말을 하고자 하니
그대는 자기와 세간을 위해서
마땅히 받아 행해야 합니다.
전생(前生)에 가난의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보시한 탓에
지금 부귀와 재산을 감응하였지만,
욕심으로 인하여 은혜를 알지 못하고
보시를 그만 두면 다시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세간의 사람들은 품삯을 받지 않으면
길에서 식량을 지려 하지 않고
빌려서 보시하거나 공양하는18) 하품(下品)은
미래에 백배의 짐을 짊어질 것입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큰 마음을 내어
항상 큰 일을 일으켜 세우시오.
만약 큰 마음으로 일을 행하면
그 사람은 큰 과보를 얻을 것이고
생각이 좁고 열등한 왕은
마음의 원(願)을 미처 접촉하지 못하니,
명성[好名]과 길상(吉祥)한 일은
마땅히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지어야 합니다.
왕후(王后) 등의 성(姓)을 원해서
그대가 아닌 법을 일삼으면
죽어서도 나쁜 이름을 일으키니
왕이여, 아주 빼어난 것[最勝]만을 행하지 마십시오.
광대한 일을 능히 일으킴은
대인(大人)의 보기 드【문】작용이니,
근기가 낮은 사람[下人]의 원을 잘 막아
명(命)으로써 이 일을 이루십시오.
자재(自在)하지 않은 물건을 버리고
홀로 몸이 미래로 들게 하고
만약 법 가운데 재산을 안치하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서로 의지할 것이니
선왕의 모든 산업(産業)을
새 왕에 귀속시키는 일을 포기하고
능히 선대의 왕을 위해서
법의 즐거움[法樂]과 명성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재산을 사용하면 현재의 기쁨을 받고
보시를 하면 미래의 즐거움에 감응하며
이 둘을 마땅히 하지 않으면
오직 괴로움만 일어나고 환희는 없을 것입니다.
장차 임종할 때에 보시를 행하려 해도
신하가 방해하면 자재(自在)를 잃게 되니
왕위에서 물러나면 신하들은 애착을 버리고
새로운 왕의 즐거움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든 물건을 버린다면
그대는 이제 법을 안정되게 펼 것이며
항상 죽음의 연(緣) 가운데 있으니
비유하자면 바람 가운데 등불과 같습니다.
이전의 여러 왕들이 세운
평등공덕처(平等功德處)인
이른바 천신(天神)의 묘당(廟堂)을
본래대로 보수하셔야 합니다.
살생을 여의고 항상 선을 행해야 하며
계(戒)를 지니고 옛것을 사랑하고 수용하며
솜씨 있게 재산을 늘리되 다툼이 없어야 하며
부지런히 힘써 항상 선을 닦아야 합니다.
맑고 깨끗해 적취(積聚)가 없고
남의 일을 버려두지 않으며
편안히 세움으로 이끄는 지도자[導首]가 되어
저 공덕장(功德藏)을 받습니다.
맹인과 병자와 불구자와
비통해 하는 자와 의지할 곳 없는 자를
묘당에 못 들어가게 하지 마시고
평등하게 그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십시오.
불도의 덕으로써 구할 수 없는 자나
혹은 다른 왕의 세계(世界)에 머무는 자에게도
공양하는 일을 똑같이 하여
내 것 남의 것 없게 행해야 합니다.
모든 법의 일에 대해서는
부지런히 힘쓰는 사람을 세울지니,
욕심이 없고 총명하며 지혜롭고 착하고
법을 침해하지 않고 죄를 두려워하는 자를 임명하셔야 합니다.
정론(正論)을 요달해서 선을 행하며
사관(四觀)의 청정을 가까이 사랑하며
아름다운 말씨를 써서 나약하지 않고
신분이 좋은 사람으로 계를 잘 지키며
은혜를 알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며
이치대로 솜씨 있게 결단 내리는 자
여덟 사람이 서로 부끄러워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여덟 자리를 임명하셔야 합니다.
유순함과 온화함으로 위대한 제도를 하며
우러러 봄과 용기로써 왕을 매우 친애하며
견실(堅實)하게 재물을 잘 사용하며
게으르지 않고 항상 선을 행하고
행하려는 일은 깊이 숙고하며
12륜(輪:연기)을 잘 변별하고
항상 사방편(四方便)을 행하는 자를
마땅히 대신으로 임명하셔야 합니다.
법의 계를 청정히 지니며
일을 요달하는데 재간이 있고
재산을 잘 늘리고 지키며
뜻을 이해하여 솜씨 있게 쓰고 셈하고
남의 심사(心事) 등에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왕을 친애하며
재산이 넉넉하고 권속이 많은 사람을
직무상의 책임자[職掌]로 마땅히 임명하셔야 합니다.
매달 반드시 대신들에게
모든 재산의 출입을 묻고
자신의 법사(法事) 등에 대해 묻고
기쁜 마음으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법을 위하여 왕위에 있으며
명성[名]과 욕망의 티끌을 구하지 않으면
왕위에 아주 이익이 있을 것이며
이와 다르다면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세간은
다분히 서로 차지하여 먹고자 합니다.
법왕의 위의(位義)를 세우고
진리에 대해 내가 말하는 것을 경청하십시오.
장로(長老)를 왕 있는 곳 가까이 두고
신분이 고귀한 이[上族]로 하여금 시비(是非)를 풀게 하며
악을 두려워하고 다분히 서로를 따르면
그로 하여금 왕의 일을 돌보게 하십시오.
처벌ㆍ투옥ㆍ곤장 등을
그 이치에 따라 행할 때
왕은 항상 큰 자비로 적시며
그들에게 거듭 은혜를 베푸시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항상 자비심을 일으키며
만약 그들이 아주 극악하더라도
역시 큰 자비를 일으켜야 합니다.
아주 극악하여 극도로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도
반드시 그에게 자비를 할 것이니
그것이 바로 자비의 그릇[悲器]이며
바르게 행하는 이의 자비의 경계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만약 투옥되었으면
5일 안에 반드시 석방하고
나머지 사람도 이치대로 따를 뿐
단 한 명이라도 억류하지 마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투옥되었는데도
오래 투옥시키려는 마음이 일어나서
사람에 따라 보호하지 말 것[不護]을 일으키면
이로 인하여 악이 항상 흐릅니다.
나아가 그가 석방되지 않고
비록 구류되었어도 안락하게 해주시고
장식품ㆍ욕탕ㆍ음료수ㆍ음식
약ㆍ부채 등을 마땅히 갖추어 주어야 합니다.
왕이 다른 사람을 그릇[器]을 이루게 하고자 한다면
자비에 의하여 좋은 가르침을 세워야 합니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 다 같으니
성냄 및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깊이 사유하여 실답게 알았다면
사람이 반역을 일으켜도
그들을 살해하거나 핍박하지도 마시고
원하건대 다른 사람의 땅으로 추방하십시오.
자신의 집을 원수처럼 살피는 것은
참구하는 사람[參人]의 깨끗한 눈을 말미암으니,
항상 방일(放逸)하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며
원하옵건대 법(法)답게 일을 수행하시오.
상(賞)은 자주 내리며 공양은
은혜 입는 사람에게 하시고,
은덕을 많이 입은 대로
보상 역시 그와 같이 하시오.
장차 많은 꽃으로 접대하고
상을 베풀어 큰 과보로 삼으시오.
인욕의 그림자를 지닌 왕의 나무[王樹]에는
백성의 새가 두루 의지합니다.
왕은 계를 지니고 잘 보시하며
위엄이 있어 물심(物心)을 얻으니
비유하자면 사탕의 향과
후추 맛이 서로 섞인 것과 같습니다.
만약 왕이 도리에 의거하여
어리석은 법을 행하지 않으면
어려움이 없고 법 아닌 것이 없어서
항상 법의 환희가 있을 것입니다.
전생으로부터 받는 것도 아니며
장차 미래에 오는 것도 아닌
왕위는 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왕위 때문에 법을 무너뜨리지 마시오.
왕위는 마치 상점과 같으니
만약 값어치대로 전했으면
거듭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하니,
이런 쓰임을 그대는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왕위는 마치 상점과 같으니
왕이 값어치대로 전하고서
다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이런 쓰임을 응당 수행해야 합니다.
전륜왕은 지(地)를 얻거나
혹은 사천하(四天下)를 갖추지만,
단지 몸과 마음의 즐거움이 있을 뿐
나머지 부귀는 모두 허망한 것입니다.
오로지 뭇 괴로움에 대치하여
이른바 몸의 희락(喜樂)을 받는 것이며
마음의 즐거움은 상(想)의 부류[類]로써
다 분별이 지은 것입니다.
괴로움에 대치함을 체(體)로 삼고
또한 분별을 유(類)로 삼으니
세간의 모든 즐거움은
허망하므로 진실이 없습니다.
주(洲)와 처(處)와 토지[土]의 거주처[居止],
앉는 곳[坐處]과 옷
음식ㆍ이부자리[臥具]ㆍ수레
아내ㆍ코끼리ㆍ말도 일회적인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하나의 반연[緣]을 따르면
그것으로 인해 즐거움이 일어나고
나머지 경계에는 반연하지 않으므로
이때 허망하여 작용이 없습니다.
오근(五根)은 오진(五塵)19)을 반연하니
마음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비록 다시 오진[塵]을 이루더라도
이것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진(塵)이 근의 소연(所緣)일 때
나머지는 주체[能]와 객체[所]가 아니니,
이 때문에 나머지 근(根)과 진은
진실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 진은 근의 소연이니,
마음이 과거의 상(相)을 취하여
분별해서 깨끗한 상(想)을 일으키면
거기에서 즐거움의 감수작용[樂受]이 일어납니다.
하나의 진은 마음의 소연(所緣)이며
마음과 진은 세상[世]과 똑같지 않으니,
이미 마음을 여의면 진(塵)이 아니고
진을 여의면 역시 마음이 아닙니다.
부모가 원인이 되어
자녀가 태어난다는 그대의 말처럼
이와 같이 눈과 색을 반연하여
식(識) 등의 발생이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근(根)과 진(塵)은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으며
현재의 근과 진은
과거세와 미래세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무의미합니다.
마치 눈이 불 바퀴를 보는 것이
근(根)의 착란에서 비롯된 것처럼
현재의 진 가운데
근이 진을 반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근 및 경계는
이 사대(四大)의 진류(塵類)이며
낱낱의 사대는 허망하기 때문에
진과 근은 부정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대가 각각을 여의고도 성립한다면
땔감 없이 불이 반드시 타야 할 것이고
만약 사대가 각자 없이 달리 사대의 체가 없다면
진(塵) 역시 이와 같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사대(四大)의 두 뜻은 허망하니
이 때문에 화합하여 같아질 수 없고
이미 화합하여 진실로 같아질 수 없기 때문에
색진(色塵)을 이루지 못합니다.
식(識)ㆍ수(受)ㆍ상(想)ㆍ행(行)은
하나하나의 체를 이루지 못하며
화합하지 못해서 연생(緣生)과 괴리되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화합도 없습니다.
마치 즐거움을 분별함이
고(苦)의 대치(對治)를 반연하여 이루어지듯이
이와 같이 계교한 고(苦)는
즐거움의 무너짐으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즐거움이 애착과 화합하여
무상(無相)을 반연하면 소멸하며
괴로움이 욕심을 멀리 여의면
이로 인하여 생겨나지 않음[不生]을 관합니다.
세간의 언설에 의거하여
마음이 보는 주체[能見者]가 된다면,
이는 옳지 않으니 보이는 대상[所見]을 여의고는
보는 주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행(觀行)으로 세간을 보면
환(幻)과 같으며 진실로 존재하지 않아
취함도 없고 분별도 없으니
반열반(般涅槃)은 불과 같습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보면
보리(菩提)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대비(大悲)의 인도로 말미암아
나중에 상속하여 부처에 도달합니다.
모든 보살의 수도(修道)를
부처님은 대승에서 말씀하셨으니
지혜가 없어서 증오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고 배척해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공덕과 과실을 알지 못하면
덕 가운데 과실의 망상을 일으키며
또한 빼어난 이익을 증오하고 질투하므로
사람들은 대승을 비방합니다.
만약 죄는 다른 이를 손상시키고
공덕은 남을 이롭게 함을 안다면,
이 때문에 비방하는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선을 증오하고 질시하는 것입니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한 맛[一味]임을 관하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니
대승은 온갖 덕의 그릇[器]이므로
비방하는 사람은 재가루가 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치우친 집착을 좇고
믿음 없는 사람은 질투와 증오를 좇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비방도 오히려 불사르는데
어찌 하물며 성냄과 질투가 있는 자이겠는가.
독으로써 독을 치료하는 것은
처방에 설해진 바와 같고
악(惡)을 소멸하는 것 역시 그러한데
이 말이 어찌 서로 모순되겠습니까.
모든 법은 마음이 먼저 행하고
마음으로써 상수(上首)를 삼으며
괴로움으로써 다른 악을 소멸하니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무슨 과실이 있겠습니까.
괴로움으로부터 만약 이익이 온다면
마땅히 취해야 할 터인데, 하물며 즐거움이랴.
이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본디 으뜸인 법입니다.
작은 즐거움을 능히 버림으로 해서
나중에 큰 즐거움을 본다면
지혜 있는 사람은 작은 즐거움을 버리고
큰 즐거움을 관해야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용인되지 않는다면
의사가 쓴 약(藥)20)을 베푼 것이
범죄로서 용서될 수 없으니
그러므로 그대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일을 보고서 온당치 않으면
지혜 있는 사람은 뜻을 말미암아 행하니,
혹은 통제하거나 혹은 열어서 허락하는데
이런 뜻은 곳곳마다 있습니다.
모든 보살의 위의(威儀)는
자비를 먼저 하여 지혜를 이루는데
대승의 이와 같은 말을
무엇으로써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침체에 빠지며
상승(上乘)은 넓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승을 비방하는 것은
자기와 남에게 원수의 집안이 되게 합니다.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
선정ㆍ지혜ㆍ자비를 체(體)로 삼고
부처님께서 대승을 말씀함이 그러한데
어찌 삿된 말의 번뇌가 있겠습니까.
보시와 지계로써 이타(利他)하며
인욕과 정진으로써 자리(自利)하고
선정과 지혜는 자리이타[自他]의 해탈입니다.
간략하게 대승의 뜻을 섭수하여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간략히 말하였습니다.
이른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해탈이며
이는 육바라밀[六度]을 장(藏)으로 삼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배척하겠습니까.
복덕과 지혜[福慧]를 종류로 하여
부처님도 보리도(菩提道)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세워서 대승이라 말하는데,
어리석은 장님은 잘 용인[忍]하지 못합니다.
허공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복덕과 지혜[福慧]의 행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니,
모든 부처님의 덕은 사량하기 어렵지만
원하옵건대 대승을 용인하십시오.
큰 덕을 가진 사리불(舍利弗)에게도
부처님의 계[佛戒]는 그의 경계가 아니니,
그래서 부처님의 덕은 사량하기 어렵지만
어찌 용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승은 생겨남이 없음[無生]을
소승은 공멸(空滅)을 말합니다.
생겨남이 없음[無生]과 소멸[滅]은 한 몸이니
자신의 주장을 위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공(眞空) 및 부처님 덕을
만약 법대로 간택한다면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지혜 있는 사람이 어찌 논쟁하겠습니까.
부처님의 뜻을 요달치 못한 말씀은
낮은 근기의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우니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의 말 가운데
자체를 지키며 손상을 입히지 마십시오.
만약 버리면 복덕이 아닌 것이 없고
증오한다면 착함이 없으니
자신을 사랑하려면
대승을 비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살의 원(願)과 행(行)
회향 등은 소승에는 없는데
소승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어찌 보살이 되겠습니까.
보살도(菩薩道)의 네 의지처21)가
소승에 설해지지 않았으니
어떤 법이 부처님이 닦은 바이며
능히 소승보다 수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진리[諦]와 조도(助道)에 의거해 볼 때
부처님이 소승과 같다면
수행의 원인[修因]이 이미 다르지 않은데
어찌 결과가 수승하겠습니까.
보리행(菩提行)의 총별(總別)은
소승 가운데 설해지지 않았고
대승 가운데 갖춰 변론되었으니,
그러므로 지혜를 마땅히 믿고 따라야 합니다.
비가라론(毘伽羅論)22)은
먼저 자모(字母)를 가르쳐서 배우게 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우는 것도 이와 같이
교화 받는[受化] 근기의 성품에 준합니다.
곳에 따라 적절하게 법을 말씀하시어
그것으로 모든 악을 여의게 하고
혹은 복과 덕을 이루게 하거나
또는 앞의 두 가지를 갖추어 의거합니다.
혹은 이 둘을 부정하여
매우 깊게 열등한 사람을 두려워하며
혹은 깊은 자비를 으뜸으로 삼아
다른 이를 위해 보리를 이룹니다.
이 까닭으로 총명한 사람은
마땅히 대승에 대한 미움을 버리며
마땅히 뛰어난 믿음을 받아 일으켜
무등각(無等覺)을 얻습니다.
대승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과
대승의 가르침을 행함으로 인하여
무상도(無上道)를 이루며
중간에 여러 가지 즐거움을 얻습니다.
보시ㆍ지계 및 인욕을
재가(在家)를 위하여 많이 설하는 것이며,
이 법은 자비를 으뜸으로 삼으니
원하건대 그대는 수행하여 성품을 이루십시오.
세간의 불평등함으로 해서
만약 왕위가 법과 괴리된다면
훌륭한 명성과 법을 위하여
일이 출가의 수승함에 미치십시오.
5. 출가정행품(出家正行品)
처음 출가하여 공부하는 사람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금계(禁戒)을 닦으며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와 율[毘尼]에 대하여
타파하고 수립하는 뜻을 많이 배우십시오.
다음으로는 정근(正勤)하는 마음을 일으켜
거친 종류의 미혹을 버려 여의는데,
그 수는 쉰일곱 가지이니
내가 하는 말을 잘 경청하십시오.
괴(怪)란 이른바 마음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며
한(恨)이란 다른 사람의 과실과 얽히는 것이요
부(覆)는 악함과 죄를 숨기거나
또한 악에 집착하고 착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기광(欺誑)이라 이름하며
첨(諂)은 이른바 비뚤어진 마음을 계속 지속하는 것이요
질(嫉)은 다른 사람의 덕에 대해 근심하는 것이며
인(悋)의 마음은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무수(無羞)와 무참(無慙)으로
자신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불하(不下)는 다른 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며
동란(動亂)은 성냄의 방편입니다.
취(醉)는 다른 것을 계교하지 못하는 것이며
방일(放逸)은 착함을 닦지 않는 것이요
만(慢)의 종류에는 일곱 가지가 있으니
내가 이제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분별을 일으키면
열등한 자가 더 열등하다거나 보통사람과 같다고 하고
열등한 자가 우월하거나 같다고 하는
이 미혹을 만(慢)이라 설합니다.
열등한 사람이 자신을 계교하여
보통사람과 같지 않다고 하니
이를 하만(下慢)이라 하며
자신을 열등한 사람의 부류로 보는데서 기인합니다.
열등한 자신을 높여
우월한 사람과 같다고 하는
이 미혹을 고만(高慢)이라 이름하니
스스로를 높여 우월한 사람과 같다고 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열등한 사람이 자신을 계교하여
우월한 사람보다 우월하다 하는 것을
과만(過慢)이라 이름하며
마치 종기 위에 수포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 가지 취한 음(陰)에서
자성(自性)은 공(空)하여 인(人)이 없는데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아(我)라 계교하니
이것을 아만(我慢)이라 이름합니다.
진실로 아직 성도(聖道)를 얻지 못하고도
자신이 이미 얻었다고 계교하여
치우친 도를 닦는 것을
증상만(增上慢)이라 이름합니다.
만약 사람이 악을 지음으로 해서
자신이 뛰어나다고 계교하고
더불어 다시 다른 사람의 덕을 배척하면
이것을 사만(邪慢)이라 이름합니다.
자신이 이제 다시는 쓸모가 없다 하고
또한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을
역시 하만(下慢)이라 이름하니
다만 자체를 반연하여 일어납니다.
이양(利養)과 찬탄을 구하기 위하여
육근(六根)을 지키며 거두고
탐욕의 뜻을 능히 은폐하는
이 미혹을 공고(貢高)라 이름합니다.
이익의 공양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애스러운 말을 하는
이 미혹은 세간의 법을 반연하는데,
이를 사언(謝言)이라 이름합니다.
저 물건을 가지려고
만약 이 재물을 찬미하면
이를 현상(現相)이라 이름하니
자신의 마음을 능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것을 얻고자 해서
남을 부정하고 배척함을 앞에 나타내는 것을
이름하여 가책(訶責)이라 하니
능히 조복해서 따르게 해야 합니다.
보시로써 이익을 구하고
저 앞선 덕을 찬탄하는 것을
이익으로 이익을 구함이라 이름하니,
이것은 오사명(五邪命)에 포함됩니다.
사람이 다른 이의 과실을 반연하여
심수(心數)로 여러 가지를 비방하는 것을
음애(愔隘)라고 하며
이것 또한 원망함에 길들여지는 마음입니다.
경포(驚怖)는 안정되지 않는 것이니
무지(無知) 및 병으로 인하며
하찮고 추한 것을 스스로 갖추며
헐뜯고 꾸짖으며 또한 게으르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물든 모습을
갖가지 상[種種相]이라 이름하며
드러난 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것을
비사유(非思惟)라고 이름합니다.
바른 일에 게으른 것을
불공경(不恭敬)이라 이름하며
스승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불존중(不尊重)이라 이름합니다.
외계에 대하여 상심(上心)의 욕심을 일으키는 것을
견고한 집착이라 이름하며
상심(上心)의 견고함을 일으켜
아주 무거워지는 것을 보편적 집착이라 이름합니다.
자기의 재산을 불려도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탐(貪)이라 이름하며
다른 사람의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을
부등욕(不等欲)이라 이름합니다.
경계가 아닌 여인에 대하여
법이 아닌 욕망을 구하여 얻고
자신에게 없는 덕을 덕으로 드러내는 것을
악욕(惡欲)이라고 말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구하는
이것을 대욕(大欲)이라 이름하며
다른 사람이 나의 덕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을
설하여 식욕(識欲)이라고 합니다.
괴로움을 받으면[苦受] 잘 안정치 못하는 것을
불인(不忍)이라고 설하며
스승을 존중하는 바른 일에 대해
삿된 행동을 하는 것을 불귀(不貴)라고 이름합니다.
법의 좋은 가르침을
경시하고 업신여김을 난어(難語)라고 이름하고
친한 사람에게 애착하여
사유하는 것을 친각(親覺)이라 이름합니다.
처소[方處]를 좋아함으로 인해
얻을 것을 사유함을 토각(土覺)이라고 하고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불사각(不死覺)이라 이름합니다.
진실한 공덕으로 인해
남이 자신을 존중하기를 원하는
이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식(識)을 반연하는 것을
순각각(順覺覺)이라고 이름합니다.
사랑과 증오의 마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남을 손해 보게 생각해서
자기 및 나머지 사람에 반연하는 것을
해타각(害他覺)이라 이름합니다.
근심스런 생각으로 더럽게 물든 마음이
의지하지 못하는 것을 불안(不安)이라고 이름하고
몸의 침체를 극(極)이라 이름하며
느린 것을 해태(懈怠)라고 이름합니다.
상심(上心)의 미혹을 좇음으로 인해
핀 몸을 굽히는 것을 빈(頻)이라 이름하며
몸이 혼란하여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식취(食醉)라고 이름합니다.
몸과 마음이 극히 피폐한 것을
하열(下劣)이라고 이름하며
오진(五塵)에 대하여 욕심을 내고 애착하는 것을
욕욕(欲欲)이라고 이름합니다.
다른 사람을 손상시키려는 생각은
아홉 인연으로부터 일어나며
삼시(三時)에 재난이 가로놓일까봐 의심하는 것을
진에(瞋恚)라고 이름합니다.
몸과 마음이 무거움으로 인해
일을 잘 못하는 것을 약(弱)이라 하며
마음이 희미한 것을 수(睡)라 하고
몸과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동(動)이라 이름합니다.
나쁜 일로 인해 후회가 발생하여
나중에 고심하는 것을 우(憂)라고 이름하며
삼보(三寶)와 사제(四諦)에 대해
우물쭈물 망설이는 것을 의(疑)라 이름합니다.
출가한 보살은
이 거친 부류[麤類]를 반드시 여의어야 하며
만약 이 악을 벗어나
대치하면 덕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이 가운데 모든 공덕을
보살은 마땅히 닦아 다스려야 하니
이른바 보시ㆍ지계와
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ㆍ자비 등입니다.
자기의 물건을 버리는 것을 보시라고 이름하며
이타(利他)를 일으키는 것을 지계(持戒)라고 이름하고
성냄을 해탈하는 것을 인욕[忍]이라 이름하며
착함을 섭수하는 것을 정진(精進)이라 이름합니다.
마음이 적정한 것을 선정[定]이라 이름하며
진실한 뜻에 통하는 것을 지혜[智]라고 이름하고
모든 중생에게
한맛으로 이롭게 하는 것을 자비(慈悲)라고 합니다.
보시는 부귀를 일으키고, 지계는 즐거움을
인욕은 사랑을, 정진은 불사름[焰熾]을
선정은 적정을, 지혜는 해탈을
자비는 모든 것의 이익을 일으킵니다.
이 일곱 법을 이루면
모두 구경(究竟)에 도달하여
사유하기 어려운 지혜의 경계인
세존의 지위에 도달합니다.
소승 가운데
모든 성문지(聲聞地)를 말하는 것처럼
대승도 역시 그렇게
보살의 십지(十地)를 말합니다.
초지(初地)를 환희지(歡喜地)라 이름하며
거기에는 기쁨과 희유(稀有)함이 있으니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三結]이 소멸하여 끊김으로 인해
마침내 부처님 집안[佛家]에 태어납니다.
이 지(地)의 과보로 인해
보시바라밀[施度]의 닦음을 현전하며
백 부처님 세계 가운데
부동(不動)으로 자재(自在)를 얻으며
섬부(剡浮) 등의 주(洲)에서
대전륜왕이 되며
세간에서 항상 보륜(寶輪)과
법륜(法輪)을 굴립니다.
두 번째 지를 무구(無垢)라고 이름하는데,
몸ㆍ입ㆍ생각 등의 업
열 가지가 모두 청정하여
자성(自性)의 자재함을 얻습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지계바라밀을 닦음을 현전하며
천 부처님의 세계 가운데
부동으로 자재를 얻습니다.
선인(仙人) 천제석(天帝釋)이
하늘의 애욕을 제거해서
하늘의 마귀와 외도들이
모두 요동하지 못하는 겁니다.
세 번째 지를 명염지(明焰地)라 이름하며
적혜(寂慧)의 광명(光明)이 일어나니
선정 및 신통을 말미암아
욕심과 성냄의 미혹이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地)의 과보로 인해
인욕을 닦음을 현전(現前)하며
만 부처님 세계 가운데서
부동으로 자재를 얻습니다.
야마천제(夜摩天諦)가 되어
신견(身見)의 습기(習氣)를 소멸하며
모든 삿된 스승의 집착을
잘 파괴하고 바르게 잘 가르칩니다.
네 번째 지를 소연(燒燃)이라 이름하며
지혜의 불이 광염(光焰)을 일으키니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정진바라밀이 현전합니다.
많은 도품(道品)을 수습(修習)하고
미혹을 소멸하여 도를 일으켜서
도솔타천왕(兜率陀天王)이 되어
외도(外道)의 견해와 계(戒)를 없앱니다.
태어남의 자재(自在)를 얻음으로 해서
시방의 불토(佛土) 가운데
가서 환생함[往還]에 장애가 없고
나머지 내용은 앞의 지(地)와 같습니다.
다섯 번째 지를 난승지(難勝地)라 이름하며
마(魔)와 이승(二乘)이 미치지 못합니다.
성제(聖諦)의 미세한 뜻이
증견(證見)으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반야바라밀이 현전하며
화락천왕(化樂天王)이 되어서
이승(二乘)을 돌이켜 대승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섯 번째 지를 현전지(現前地)라 이름하며
바르게 불법을 향하기 때문에
자주 정혜(定慧)를 익힘으로 인하여
소멸의 원만함을 증득합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방편지(方便智)가 현전하며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되어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가르칩니다.
일곱 번째 지를 원행(遠行)이라 이름하며
멀리 행하면서 자주 상속합니다.
여기서는 생각 생각마다
생겨남 없음[無生]과 소멸함 없음[無滅]을 얻습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방편지(方便智)가 현전하며
대범왕(大梵王)이 되어서
제일의(第一義)에 통달합니다.
방편승지(方便勝智)를 증득하여
육바라밀이 짬 없이 생겨나서
삼승의 세속 가운데
빼어난 제일의 스승이 됩니다.
동자지(童子地)는 부동이니
진관(眞觀)을 내지 못함으로 인하여
분별도 없고 사량하기 어려워서
몸ㆍ입ㆍ뜻의 경계가 아닙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원바라밀[願度]이 항상 현전하며
승변광범왕(勝遍光梵王)이 되어서
정토 등에 자재합니다.
이승(二乘) 등은 미치지 못하고
진속(眞俗)의 한 뜻 가운데
동(動)과 정(靜)을 둘 다 닦기 때문에
자리와 이타를 짬 없이 행합니다.
아홉 번째 지를 선혜지(善慧地)라고 이름하며
범왕태자(梵王太子)의 위(位)가 되는데,
여기서는 지혜가 가장 수승하여
사변(四辯)에 통달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하여
역바라밀[力度]이 항상 현전하며
변정범왕(遍淨梵王)이 되어서
네 가지 답변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열 번째 지는 법운(法雲)이라 이름하니
정법의 비를 능히 내리며
부처님의 광명의 물로 몸을 관정(灌頂)하고
부처님의 관정위(灌頂位)를 받습니다.
이 지의 과보로 인해
지바라밀[智度]이 항상 현전하며
정거범왕(淨居梵王)이 되어서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이 됩니다.
지혜의 경계는 사량하기 어려우며
모든 부처님의 비밀장(秘密藏)이며
자재를 구족할 수 있어서
나중에 보처위(補處位)에 태어납니다.
이와 같이 보살지(菩薩地)의
열 가지를 내가 이미 말하였으니
불지(佛地)와 보살지(菩薩地)는 다르지만
사량하기 어려운 수승한 덕을 갖추었습니다.
이 지를 단지 간략하게 말하면
십력(十力) 등이 상응하는데,
이 낱낱의 힘에 따르는 것은
마치 허공처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무량한 덕을 말하였습니다.
시방의 허공과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무량한 덕을
나머지 사람들이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 원인을 보지 못한다면
이 결과대로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원인 및 결과를 위해서
부처님 탑을 현전해서
하루 각 세 번씩
원하옵건대 스무 게송을 독송하십시오.
모든 부처님의 법과 승단[僧]
모든 보살에게
나는 머리를 숙여 귀의하며
다른 존귀한 분 역시 공경합니다.
나는 모든 악을 여의고
모든 선을 섭수하여 지니며
중생의 모든 선행(善行)에
따라 기뻐하고 순리대로 행하겠습니다.
머리 숙여 모든 부처님께 예경하며
합장하고 머무르며 권청하니
원하옵건대, 법륜을 굴리시어서
삶과 죽음의 마지막을 끝내주소서.
지금 행하는 나의 덕과
이미 행한 덕 또는 행할 덕으로 인하여
원하건대 중생이
모두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소서.
모든 장애와 어려움을 제도해서
원만하고 무구(無垢)한 근(根)으로
청정한 명[淨命]의 상응을 갖추어서
저 자재한 일을 하기를 원하옵니다.
모든 갖춤에 변제(邊際)가 없이
보배 손[玉手]과 더불어 상응하며
후제(後際)를 궁구해도 다함이 없기를
중생이 이와 같도록 원하옵니다.
원하옵건대, 모든 여인이
다 뛰어난 장부가 되고
항상 모든 때에
밝음[明]이 충분해서 원만을 얻기를.
뛰어난 용모와 위덕(威德)
훌륭한 색(色)을 남이 사랑스럽게 보며
병이 없고 건강한 힘[力辦]을 갖추며
장수하도록 원하옵니다.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해탈하며
한결같이 삼보에 귀의하며
방편의 선교(善巧)로써
불법의 큰 재산을 이루소서.
사랑[慈]과 연민[悲]과 기쁨[喜]과 깨끗한 믿음[淨信]으로
항상 사범주(四梵住)에 거주하며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
지혜(智慧)로 장엄하게 되기를.
복덕과 지혜의 행을 원만히 하여
상호(相好)에 광명이 비추고
저 사량(思量)하기 어려운
십지(十地)를 행함에 장애가 없기를 원하나이다.
이 덕과 더불어 상응하고
나머지 덕으로 장엄되는 곳에서
모든 과실을 해탈하여
내가 중생을 사랑하기를 원하옵니다.
모든 선과
중생이 즐기는 바를 원만히 하고
다른 사람의 온갖 괴로움을 능히 제거하니,
내가 항상 이와 같기를 원하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두려움이 있다면
어떤 때 어떤 장소에서나
내 이름을 기억만 해도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기를.
나의 공경과 믿음 및 성냄을
보고 또 기억해 지닌다면,
나아가 내 이름을 듣는다면
저 보리를 결정하기를 원하옵니다.
내가 오통(五通)을 얻어
항상 모든 생에 따르기를 원하며
내가 항상 중생의 선(善) 및 즐거움을
능히 낳기를 원하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고자 하면
모든 세계 가운데
그 악을 두루 끊고서
이치대로 선(善)을 닦게 하기를 원하옵니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약초 및 산림을
다른 사람이 받아쓰고자 하면
내 스스로 참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마치 자신의 수명을 생각하듯 하기를 원하며
중생을 생각하기를
자신보다 만 배 더 사랑하기를 원하옵니다.
그들이 행한 악은
나의 과보로 이숙(異熟)되고
내가 행한 선은
그들의 과보로 이숙되기를 원하옵니다.
한 사람이라도 해탈하지 않으면
그 존재[有]가 태어나는 길을 따르면서
나는 그들을 위하여 머무르며
먼저 보리를 취하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능히 이와 같이 수행하니
만약 복덕에 체(體)가 있다면
항하의 모래 세계만큼
그 공덕이 무량할 것입니다.
불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원인[因]을 헤아리기가 어렵고
중생의 세계도 무량하며
이익과 서원도 역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이 법을 나는 간략하게 말하였으니
자리와 이타를 능히 일으키십시오.
원하건대 그대는 자신을 사랑해 염(念)하듯이
이 법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사랑하면
이는 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이 사랑하는 바로 미움에 응하면
이 미움은 법을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법 섬기기를 몸처럼 할 것이며
행 섬기기를 법 섬기듯이 하십시오.
행처럼 슬기[慧]를 섬기는 것도 그러하고
슬기처럼 지(智)를 섬기십시오.
청정한 순종에 지혜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설복시키고 정리(正理)를 말합니다.
자신의 악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이 사람은 자신의 일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이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그대는 간략한 모습이라도 알아야 하나니,
충분한 앎[知足]과 자비와 계율
그리고 지혜는 악을 능히 소멸합니다.
좋은 벗은 그대를 가르칠 것이니
그대는 알아서 공경하며 따르고 행하십시오.
안팎의 뛰어난 덕으로 인해
그대는 반드시 수승한 곳에 이를 것입니다.
진실한 서원으로 자애로운 말을 설하면
즐거움의 성품이 흔들릴 수 없지만,
바른 일에는 아첨과 왜곡이 증대하니
원하건대 그대는 스스로 쉽게 가르치십시오.
이미 버리어 후회가 없으며
생각을 불살라 마음이 적정하며
게으름의 느슨함과 들뜸의 움직임이 없고
교만하지 않으며 화합하고 동화하시오.
원하건대 청량한 달처럼
불길이 치솟는 해처럼
매우 깊은 바다처럼
견고하게 머무는 수미산[山王]처럼 되십시오.
모든 과(果)를 여읜 곳
뭇 덕으로 장엄된 곳
중생이 수용(受用)하는 곳
원하건대 그대의 일체지(一切智)입니다.
나는 단지 왕만을 위해
이와 같은 선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일체를 이롭게 하고자 함을 말미암습니다.
대왕이여, 이 정론(正論)을
그대는 매일 진리로 알고 경청해서
자기와 남을 위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도록 하시오.
수승한 계는 어른을 공경하며
인욕은 질투가 없으며
재물을 아끼지 않음은 만족을 아는 것이라서
어려운 일에 떨어진 사람을 구제합니다.
착하고 나쁜 사람을 능히
거두어 지니고 다스려 조복시켜서
널리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을 마땅히 행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4689 보현보살행원찬(普賢菩薩行願讚) (0) | 2024.08.21 |
---|---|
[적어보자] #4688 보현금강살타약유가염송의궤(普賢金剛薩埵略瑜伽念誦儀軌) (0) | 2024.08.21 |
[적어보자] #4686 보변광명청정치성여의보인심무능승대명왕대수구다라니경(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 하권 (0) | 2024.08.21 |
[적어보자] #4685 보변광명청정치성여의보인심무능승대명왕대수구다라니경(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 상권 (2) | 2024.08.20 |
[적어보자] #4684 보유목록(補遺目錄) (0) | 2024.08.20 |
댓글